내가 사귀었던 낟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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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귀었던 낟알들 
      
      작년 여름 경기도 청평 품목골의 작은 논가에 서 있었다. 
      발 밑에는 김을 매지 않은 논이 마치 세수도 며칠식 안하고 
      돌아다니다 물을 실컷 먹고 퍼져 있듯 
      잡초들과 뒤엉키고 키들도 멋대로 커 있었다. 
      그 앞으로는 강원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고 내려왔다는 듯 
      신이 나서 경쾌하게 보이는 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모두가 푸른 빛을 띠었다고 게을러 보이는 이 논도 
      좌우간 푸른빛을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너희들을 가꾸어 주는 사람은 누구냐?"
      "도대체 너희들의 주인이 누구냐?"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렇게 몇 마디 물어 보았으나 통 답이 없었다. 
      영글어 가는 낟알들이 아무리 답을 했지만 
      나의 귀로는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좋아, 가꾸어 주는 사람은 누구든 간에 대자연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힘을 입어 좋은 장소에서 너희의 능력대로 
      자유롭게 자라고 있다는 것쯤은 내가 신부인데 왜 모르겠니?"
      조용히 쭈그리고 낱알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문득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올랐다. 
      마치 여러 사람들이 걸어오고 가고 무엇을 찾고 기다리고 
      줄지어 가는 연상을 하였다. 
      '이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사귈 수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에 
      이미 나는 벼들을 두 손으로 모아 부드럽게 쥐고 있었다. 
      벼알들은 순식간에 밀집해지며 "웬 일이야!"하며 모두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놀라서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저들에게 그 때 그만 무서운 말을 했다.
      "너희들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냐고, 내 말이 들려?" 하고는 
      동심도 멍들고 시상도 병든 어른이 되어 버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을 훌쩍 떠나 버렸다.
      
      "신부님, 무공해 쌀이 있는데, 그리 많지는 않고 두어 가마니 정도나 될까, 
      아무튼 추수해서 그중 얼마는 떡을 해 드시든 밥을 해 드시든 
      맛있게 들어요."하고 그 곳의 신자이며 친구인 아무개가 이런 말을 
      들려준 때는 작년 가을이었다.
      "어디 쌀인데?"
      "왜, 거기 청평 품목골 있잖우. 거기 버려진 상태로 그냥 뿌리고 
      전혀 가꾸지 않고 자라도록 내버려 둔 작은 논." 
      보통 때의 밥공기를 들 때와는 기분이 야릇해 오는 감을 느꼈다.
      "누구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냐고?"
      그제서야 그 쌀알들이 답을 하는 것이었다.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야, 너."
      밥을 한 숟갈식 뜰 때마다 수많은 말들이 들려 왔다. 
      일일히 응답을 하면서 먹어야 했다.
      
      "너는 그렇게 미래를 모르는 인간이구나."
      "그래, 너는 우리를 먹고서 무슨 일을 얼마나 보람있게 할 참이냐?"
      "우리 쌀들은 네 식탁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난을 겪었는지 알어? 
      고향을 모두 이별했고, 옷을 몽땅 벗기었고, 알몸으로 대홍수를 만났고, 
      온천인 줄 알고 멋 모르고 있다가 홀랑 데고 말야. 
      이젠 영 소생할 수 없는 너의 밥알이 된 거야."
      "하느님이 주신 생의 능력을 우리는 모두 너에게 바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니 창조주의 뜻을 네가 대신 아니 그 이상 꼭 해주리라 믿어. 
      우린 알아. 너는 우리를 먹을 권리가 있는, 만물을 지배하는 영장이라는 것. 
      아니, 오히려 우리는 영광이라고 생각해."
      "네가 우리를 먹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그 이상 우리 쌀들에게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니! 신부인 너만이 아니야."
      
      나의 마지막 답은 이것이었다.
      "너희들의 말을 글로 엮어 알릴 게 염려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