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오신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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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사오신 구두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전 이야기이다. 
      어느 일요일, 아버지가 면회 왔다고 전달을 해주었다. 
      “틀림없다. 드디어 구두를 사오셨구나!”하면서 계단을 신나게 
      콩콩콩콩 하면서 달려 내려갔다.
      
      나는 1957년 봄에 서울 혜화동 동성 학교 뒤에 자리한 성신 중고등 학교에 
      신학생으로 중학교 일학년으로 입학하여 착실하게 공부하며 자라고 있었다. 
      중학교를 마치면 고등학교도 그대로 올라가야 하는 제도였다. 
      학생들은 중1부터 전부 신학교 공동 기숙 생활을 해야만 했다. 
      고등 학교 일학년이 되어 교모에 높을 고자를 달고 나니 어깨가 으쓱하고 
      괜히 건들거리고 싶은 마음은 신학생이라고 없을 리 없었다. 
      
      나는 그 때에 남들처럼 튼튼한 구두가 신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다 워커에 까만 물감을 들여서 갖다 달라고 편지를 썼던 것이다. 
      면회실에 커다란 잠바를 입으신 갸름한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시며 계셨고 
      탁자 위에는 신문지로 싼 큼직한 물건이 있었다. 
      아버지 앞에 서서 인사를 깍듯이 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대견하게 보여야 하고 사치하게 보이면 안 되고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해도 안 되고 모든 게 좋다고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아버지를 만나니 기쁘기도 하지만 어색한 심리 상태이기도 했다. 
      이러저러한 문안을 올린 후에 아버지는 구두를 풀어서 신어 보라는 것이었다. 
      
      잔뜩 호기심에 싸여 신문지를 한 겹 두 겹 벗기면서 ‘군인 구두인 워커보다는 
      일반 구두면 더 좋을 텐데...’ 하는 사치한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안 돼! 아버지가 신학생인 나에 대해 실망하실 거야.’하면서 풀었는데 순간 
      번쩍하고 빛나는 구두 코끝이며 발목의 부드러운 가죽이 아주 비싼 부츠였다. 
      
      당시에는 이런 구두면 백명 중 한두 명이 신을까 말가한 정도였다. 
      외출하거나 놀러 갈 때 신으면 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서울 장안을 두 바퀴씩 자전거로 도시면서 
      자동차 부속을 배달하는 일을 하시는 때였다. 
      아버지의 힘든 일을 생각하며 나의 콧속이 새큼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 부속 판매가 전망이 있다며 너도나도 끼어들었고 
      서울이라도 자동차들이 너무나 적어 소비가 잘 안 되므로 
      이 장사는 누가 계속 더 많이 외상을 깔아 놓느냐 하는 경쟁의 때였다. 
      
      이 정도의 구두를 사려면 일 주일 정도의 수입을 
      몽땅 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불현듯 퉁명스럽게 말을 해 버리고 만 것이다.
      “아버지, 나 이거 안 신을래.  도로 가져가요.” 속으로는 가져 가실까 봐 
      불안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말이 왜 이렇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좀 멋부리려고 혼자 몰래 꿈꾸던 것을 그 이상으로 알아맞혔다는데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내 안에서 동의도 없이 발동해 버린 것이다. 
      나는 왠지 아버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까지 갑자기 들었다. 
      아마 반항기라 그랬는지, 너무 좋아 그랬는지, 
      욕망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허탈감에 그랬는지 좌우간 잘 모르겠다.
      
      “내가 워커 물들여 달랬지 누가 이런 거 갖다 달랬어?” 원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좋게만 해석하시는 착하신 분이셨다. 
      착하신 아버지시기에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속으로 이유를 
      아버지께 돌리는 심산도 일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그래도 아버지가 기껏 사온 건데 신어 보기라도 하려무나.” 
      나는 하라는 대로 묵묵히 신어 보았다. 약간 큰 정도였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이나 좋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색한 투정을 하면서 사치하다느니, 운동장에서 마구 신지는 못하겠다느니, 
      너무나 커서 양말을 다섯 개는 신어야 되겠다느니 하며 투덜대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속마음이나 겉마음도 모두 동의해서 
      싫다는 쪽으로 밀어 부치기로 작정해 버렸다. 
      한참이나 나의 어리석은 이중 심리적 불평을 들으시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며 멋적은 손놀림으로 꾸역구역 다시 싸시는 아버지의 모습, 
      그때 그 모습이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으면 언제나 내 마음에 
      뭉클하며 솟아 피어난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을 지내셨고, 글쓰시기를 좋아 하셨고, 
      공무원으로 오래 계셨고, 다음에 6.25 이후에는 장사에 손을 대셨지만 
      워낙 마음이 선하셔서 이익 남기는 것을 무슨 죄라도 지은 양,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시며 괴로워하시었다. 
      어머니와 이 점에서 자주 다투시는 것을 여러번 보아왔다. 
      그러나 다투는 것은 자식들이 있을 때였고 단둘이 있을 때에는 
      어머니가 사과를 하시며 마음을 곱게 먹고 험한 세상 서로 사랑하며 
      살기로 결론을 내리곤 하는 것을 나는 잠결에서 여러번 들어왔다.
      
      아버지의 깊은 곳에 뿌리 박힌 선한 성품에서 나는 선비, 스승, 어른, 
      지도자들의 개념이 잡혔고 인내, 용서, 화해, 진리, 희생 같은 추상 단어를 
      파악하는 원소를 얻은 것이다. 오늘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이 절로 난다. 이미 세상을 떠난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나의 선비, 스승, 어른, 지도자이시며 인내, 용서, 
      화해, 진리, 희생을 가르치고 계신 분이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때 구두를 도로 싸가지고 자전거에 실으실 때 나의 발은 
      꿈틀꿈틀 하며 막을가 말가의 신경이 교차되었다. 
      끝내 실려 보낸 이중 성격의 요사스런 나는 
      오늘도 아버지께 반성을 사랑으로 드린다. 
      어쩌면 그렇게 나무라시거나 타이르심 없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주셨는지... 
      다른 아버지들은 우리 아버지를 비웃겠지만 바로 그런 아버지였기에 오늘도 
      아버지의 가르침은 전류 같은 에너지로 지속되며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