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3일) 성 안스카리오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4-30 (목) 20:03 ㆍ조회:412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3일) 성 안스카리오
    
     
    
    성 안스카리오(Anschar) 축일 2월 3일  
    신분 대주교, 선교사, 활동지역 브레멘-함부르크(Bremen-Hamburg) 활동연도 801-865년    
    
     같은이름- 안스가르, 안스가리오, 안스가리우스, 안스카르, 안스카리우스 
    
    프랑스 아미앵(Amiens) 근교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성 안스카리우스(Anscharius, 또는 안스카리오)는 
    5세 때 어머니의 사망으로 수도원에서 자랐으며, 814년경 피카르디(Picardie)의 옛 코르비(Corbie) 
    수도원(베네딕토회)에서 수도자가 되었다. 826년에 그는 선교사로서 덴마크에 갔으나 
    스웨덴에 관한 관심이 더 커서 3년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829년에 스웨덴으로 갔다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새로운 코르비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32년에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4세(Gregorius IV)에 의해 함부르크의 주교로 축성되었고, 
    스칸디나비아 백성들과 슬라브인들을 돌보라는 교황의 명을 받았다. 845년에는 바이킹(Viking)의 침입으로 
    13년 동안 선교 활동을 해오던 함부르크가 파괴되어 큰 좌절을 겪었고, 848년에는 브레멘 교구와 
    파괴된 함부르크 교구의 합병으로 브레멘-함부르크 대교구가 설립되면서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에 의해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다시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놀라운 정열로 선교 활동을 재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같은 성공의 그의 뛰어난 설교력, 
    엄격하고 거룩한 생활 그리고 수많은 기적의 힘이었다. 
    그러나 성 안스카리우스는 865년 2월 3일 브레멘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후 그 모든 선교 사업들이 중단되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아직 그리스도교가 뿌리 내릴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 안스카리우스는 '북유럽의 사도'로 불리며, 스칸디나비아의 선교사이자 사도로서 높은 공경을 받고 있다. 
    그는 안스가리우스(Ansgarius)로도 불린다.
     
    
    
     성 안스가리오 주교 -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장)
     
    ‘북유럽(스칸디나비아)의 사도’로서 수도원장이요 대주교였던 성 안스가리오는 801년 서프랑크 왕국, 
    현재 프랑스의 꼬르비에서 태어났다. 로마 제국은 313년 가톨릭을 국교로 정한 뒤 이교의 암흑에서 벗어나 
    진리의 찬란한 광채 속에 은총을 받았지만, 북유럽은 9세기까지 우상을 섬기며 암흑 속에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어 덴마크와 스웨덴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가 바로 안스가리오이다.
     
    그는 어려서 모친을 잃고 13세 때 북프랑스 꼬르비에 있는 베네딕도 회에 들어가 거기서 교육을 받고 
    수사 신부가 되었다. 학식이 풍부하고 덕행이 높았으므로 수도원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 후 독일 중부의 유명한 콜베이 수도원에서 교사요 설교가로 활약하였다.
     
    안스가리오는 독일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 보니파시오의 용감한 선교 활동에 감명을 받고 
    자기도 그러한 복음 전파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827년 덴마크 왕 하롤드가 개종하자 
    독일 황제 루드비꼬의 명을 받아 그의 친구 알베르또와 함께 선교사로 파견되어 신천지의 개척에 용약하였다.
     
    그러나 신자이던 하롤드 왕은 백성들의 반대로 국외로 추방되고 친구인 알베르또도 발병하는 등 
    열심히 전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3년 만에 되돌아오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기구하며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 해 스웨덴에서 선교사 파견 요청이 있자 
    콜베이의 수사 비트말과 함께 즉시 그곳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탄 배는 항해 도증 해적을 만나 
    일체의 물품을 약탈당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스웨덴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을 안 스웨덴의 비요룬 왕은 그들을 정성껏 환영하고 여러 모로 전교의 편의를 보아주었다.
     
    18개월 뒤 안스가리오는 루드비꼬의 귀국 명령을 받고 돌아와 831년 콜베이의 수도원장이 되고 이듬해는 
    교황 그레고리오 4세에 의하여 새로 설치된 함부르크 교구의 대주교 및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덴마크와 스웨덴과 루드비꼬 사이의 조정에 힘쓰고 교회와 수도원 건설에 노력하였다. 
    그 후 매년 선교사들이 안스가리오의 지도하에 덴마크와 스웨덴에 진출하여 이교 백성들의 교화에 노력하였으나 
    이 백성들은 여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루드비꼬 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북부 지역 
    전교 활동의 자금도 끊어지고 843년부터 3년간 대흉작이 계속되었다. 또한 북유럽 해적이 침입하여 
    함부르크를 불질러 모든 것이 잿더미로 화해버려 경제적으로도 크나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스웨덴과 덴마크도 이교로 되돌아가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847년 공석 중인 브레멘 주교로 임명되어 함부르크 교구와 합치됨을 계기로 다시 용기를 내어 
    북유럽 선교 활동을 새롭게 재개하였다. 그의 동지 스웨덴 주교 구벨모와 832년부터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활동해오던 니탈도도 이교도의 반란 중에 체포되었기에 안스가리오 자신이 덴마크로 가서 하아릭 왕을 회개시키고 
    하아릭 왕의 소개로 스웨덴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스웨덴 왕 올아프는 제비 뽑기라는 이상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하였으나 결국은 왕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의 노력은 차츰 보상되어 그 교세가 융성하게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순교자가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은 이루지 못했지만 안스가리오는 865년 2월 3엘 64세의 나이로 
    브레멘에서 평안히 주의 품으로 갔다. 그의 유해는 주교좌 성당에 안장되었다.
     
    역사가들은 안스가리오를 가리켜 뛰어난 설교가요 탁월한 행정가요 겸손하고 금욕적인 사제였다고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에게 헌신적이어서 그들의 발을 닦아주고, 식사하기 전엔 반드시 불행한 자 3, 4명에게 
    음식을 주었으며 매일 바쁘게 일을 하면서도 틈을 내어 기도와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조금도 세월을 
    허송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교황 니꼴라오 1세에 의하여 시성되고 축일은 2월 3일이다.
     
    “만열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1고린 9,16)라고 한 사도 바오로처럼 
    전심전력으로 복음 선포에 투신했으나 성공 대신 수많은 실패와 고통을 당한 안스가리오 성인. 
    그러나 그는 끝까지 좌절하지 않고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분기하였다. 우리도 그러한 성인을 본받아 
    이 나라 이 민족의 복음 선포에 더욱 헌신하며 어떠한 역경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계속 매진해야 하겠다.
    (경향잡지, 198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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