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4월 21일) 성 콘라도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8:31 ㆍ조회:626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21일) 성 콘라도  
    
    
     
    성 콘라도(Conrad) 축일 4월 21일  
    신분 수사, 활동지역 파르참(Parzham) 활동연도 1818-1894년    
    
     같은이름-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성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Bayern)의 파르참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지만 매우 신심이 깊었으며 아홉 자녀를 두었는데 
    콘라두스는 막내둥이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 속에서 성장하였다. 
    양친을 여읜 후 31세의 나이로 카푸친회 평수사로 입회하여 1852년에 서원을 발하였다. 
    그 후 그는 40년 동안 문지기 수사로서 봉사했는데, 순례자들의 무리가 끊임없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애덕과 인내를 실천하며 사도적 정열을 불태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었다. 
    그는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은혜를 받았고 미래의 일을 알리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사후 40년이 되는 1934년 같은 교황으로부터 시성되었다. 
    
    
    
    맥주 맛을 잘 아는 거룩한 문지기, 
    파르잠의 성 콘라도(Conrad of Parzham, 1818-1894)
    
    맥주와 성덕 
    
    “맥주 두 조끼 말이오? 독일 출신 처녀라면 맥주 두 조끼로 술이 취할 리가 없지 않소!” 
    당시 뮌헨 대주교는 시성조사 심문관에게 웃으면서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시성조사 심문관이 젊은 여인들을 포함한 모든 형제회 손님들에게 맥주 두 조끼씩 마실 것을 
    줌으로써 여성 혼취를 조장했던 것 같은 그 시성 후보자의 성덕에 이의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그 시성 후보자가 카푸친회의 거룩한 문지기였던 ‘파르잠의 성 콘라도’였음을 알고 있다. 
    
    그는 남독일의 농부 아들로서 자기 민족의 장단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어서 와, 한 잔 더 하십시오.”라는 말로 콘라도 성인은 나름대로 물 한잔 주라는 복음의 권고를 
    형제회를 찾는 손님들에게 실천했다. 그러므로 순례자가 많이 올 날 아침이면 콘라도는 
    맥주 양조업자 형제에게 “오늘은 맥주 많이 만들어 두게나.” 하고 미리 대비하곤 했다. 
    
    신앙심이 깊은 젊은 농부 
    
    바르톨로메오 비른도르퍼(Birndorfer)와 게르트루다 니더마이어(Niedermayer)의 아들로 1818년에 태어난 
    콘라도는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출생지는 ‘파르잠(Parzham)’이라는 바이에른의 농촌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성적이 좋았으나 어버이가 젊은 나이에 죽어서 요한은 농사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 시절의 요한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종교적인지, 얼마나 기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지 잘 알고 있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성당에 다녔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도 오래 동안 혼자서 기도하곤 했다. 
    그는 특히 성모신심이 깊었고 바이에른의 성모성지들을 걸어서 순례하기도 했다. 
    
    카푸친 평형제 되다 
    
    수도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꼈던 요한은 결국 1849년에 농장에 대한 상속권을 포기하고, 
    알퇴팅(Altötting) 성모성지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평형제로 입회하여 ‘콘라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는 이미 만 31살의 성인이었다. 몇 년간의 양성을 받은 후에 그는 알퇴팅 형제회의 문지기라는 사명을 받았다. 
    
    수줍음이 많은 문지기 
    
    그로부터 49년 후 그가 죽는 날까지, 콘라도 형제는 매일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이 문지기 봉사에 최선을 다했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 탓에 기도 하는 것과 고독한 생활에 매력을 느꼈지만, 알퇴팅 형제회의 정문 앞은 
    공교롭게도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하지만 콘라도는 이에 개의치 않고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했으며, 
    특히 멀리서 온 순례자들을 반갑게 환대했다. 그 누구든지 콘라도에게서 건강에 좋은 음식과 
    시원한 맥주가 담긴 ‘슈타인’이라는 독일식 큰 잔을 늘 받을 수 있었다. 
    
    스스로도 맥주를 마시기를 좋아함 
    
    콘라도 스스로도 매일 시원한 맥주 한 잔 정도를 즐겼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로마 성성의 관리인들은 시성 후보자가 매일 맥주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에 놀라워 그 맥주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단다. 그래서 콘라도 형제가 마셨던 맥주 한 통을 독일에서 로마로 보내라고 명명하였는데, 
    20세기 초였던 그 당시 맥주를 로마까지 보낼 수 있는 효과적 교통수단은 기차뿐이었다. 
    그 시절에 기차에 냉장고가 있을 리 만무했으니 한 여름 뙤약볕에 도착한 그 맥주는 시원하기는커녕 
    맛이 갈 수 밖에 없었다. 관리인들은 그 맥주를 한 입 맛보고는
     ‘그 사람은 분명 이 맥주를 고행으로 마신 것이로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 
    
    콘라도 형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준 형제였다. 특히 가난한 집의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고, 그 아이들을 위한 덕담을 즐겨 들려주곤 했다. 
    때로는 찾아오는 거지들이 그가 내어주는 소박한 음식에 불만을 터트리며 메뉴를 바꾸라고 
    귀찮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자비로운 콘라도 형제는 그들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응했다. 
    한번은 콘라도 형제가 그들에게 ‘오늘 우리는 빵과 국물 대신에 국물과 빵을 대접할 것입니다.’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건네받은 뜨거운 국물을 나이 많은 콘라도 형제의 얼굴에 던져버렸다. 
    너그럽고 인내심 많은 콘라도는 마냥 미소를 지으며 아무 일 없는 듯이 얼굴을 닦고 계속 일을 했다. 
    
    욥과 같은 대단한 인내 
    
    인내심은 콘라도가 가진 탁월한 덕행이었다. 아이들은 그 인내심을 실험하려고 짓궂은 행동을 많이 했다. 
    초인종을 울리고 그가 나타나기 전에 도망간 적은 흔한 일이었고, 부재중인 사제들의 이름을 외우고 
    차례로 와서는 그 사제를 불러달라고 부탁하여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나이 든 몸인데도 불구하고 
    콘라도 형제는 아이들의 요구에 아무른 불평없이 끊임없이 계단에 오르내리며 확인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어린 손님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표하곤 했다. 
    그래도 그 철없는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콘라도에게 달려가서 예전에 그가 가르쳐줬던 짧은 기도를 
    함께 바친 다음 음식 몇 조각을 받아먹곤 했다. 
    
    콘라도 형제의 매일 일정표 
    
    콘라도의 일상적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수년 동안 앓고 있었던 제의실 담당 형제를 대신하여 
    새벽 3시반이나 4시쯤에 성당문을 열었고, 4시 반이면 은총들의 경당(Gnadenkapelle)에서 
    5시 새벽미사를 하기 위해 사제를 깨웠다. 그리고 미사에서 복사 역할을 했다. 
    콘라도는 성체 신심이 매우 깊었는데, 다행이 영적지도자의 도움으로 그 당시 매우 드문 
    ‘매일 영성체’를 할 수가 있었다. 
    이외에도 매일 아침에 한 번 더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에 대한 열성을 보이며 자주 묵상으로 빠져들었다. 
    
    정식으로 문지기의 의무가 시작되는 아침 6시부터는 ‘미사예약일지’를 확인하여 신자들이 요구한 
    한 성물과 축복된 씨앗이나 약초로 만든 약을 정리했고, 신자들이 예물을 전할 땐 기도할 때에 
    기억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곤 했다. 미사를 위하여 재단을 준비하였고 늘 제의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방문하는 사제들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고, 
    축복이나 고해 성사를 구하는 손님을 위하여 사제 형제들을 부르는 일도 콘라도의 일이었다. 
    
    그 지역에는 손님이 왔을 때 맥주와 먹을 것을 내어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한 형제회 수호자가 이 풍습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것을 끝내려고 했다. 
    그러자 순례자들의 불만이 드높아졌는데 이 모든 불만을 문지기인 콘라도 형제가 다 들어주어야만 했다. 
    
    오전 11시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프를 받으러 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콘라도는 부엌에 가서 
    국물과 고기 완자를 요리사 형제한테 달라고 부탁했다. 한번은 콘라도가 나타나자 주방장 형제가
     “모든 냄비들을 덮어라! 아니면, 그가 모든 것 다 빼앗아갈 거야!” 하고 농담을 했는데, 
    그러자 콘라도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너그럽게 갚게 될 것이오.” 하고
     대답하곤 했다. 콘라도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과 수프를 먹여줄 때였다. 
    
    보통 12시가 되면 공동체 기도에 참석하고 점심식사를 하는데, 식사 때에 초인종이 울릴 때면 콘라도는 
    한사코 먼저 일어나 정문으로 갔다. 돌아오면 음식이 다 식은 상태일 때가 많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2시 반부터 오후 2시가지 쉬는 시간이었지만 콘라도는 쉬지 않고 정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은총들의 경당 제단 앞에서 기도를 하거나, 아니면 계단 밑에 있는 작은 창고에 들어가 감실을 향해 
    조용히 묵상을 하곤 하였다. 
    
    오후가 되면 고해성사를 받으러 오는 사제들을 맞아들였고, 틈틈히 신자들이 털어놓는 고민들을 들어주며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을 위로해주곤 했다. 오후 4시쯤에는 학교를 마치고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빵 조각을 쥐어 주기도 하고, 그 사이에 시간이 있으면 성경 구절을 읽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과 같은 여러 종교서적을 읽곤 했다. 오후 7시, 저녁 식사 후 손님이 없을 경우, 
    성체조배를 하거나 묵주를 만들곤 했고, 저녁 9시가 되면 성당문을 닫은 다음, 
    하느님과 시간을 홀로 가지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기도에 지쳐 깜빡 잠에 빠진 일도 있었다. 
    
    콘라도의 침묵과 기도 
    
    침묵과 기도와 묵상은 그에게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분위를 계속 유지하려 노력했다. 
    말해야 할 때에는 가능한 한 하느님이나 거룩한 일들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곤 했고, 
    항상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도록 노력했다. 시사나 뉴스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873년, 아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콘라도 자신의 내면생활을 대해 묘사한 구절이 있다. 
    
    “나의 생활방식은, 사랑하고 고통받고, 경탄하고 흠숭하며 나같이 불쌍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하여 마지않는 거야. 
    이토록 큰 하느님의 사랑을 헤아리다 보면 끝이 없게 된다. 여기에 나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럴 때 난 좋으신 하느님과 아주 밀접히 결합되어 있단다. 내가 해야 할 수많은 일 중에서, 
    분주하면 분주할수록 나는 하느님과 더욱 일치되어 있음을 느껴. 이때 나는 마치 사이좋은 부자지간처럼 
    그분과 아주 다정하게 사랑을 나눈다. 나는 그분께 내 마음을 짓누르는 나의 온갖 사정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지. 
    그리고 마치 천진난만한 아기처럼 이러저러한 은총을 주시라고 부탁드린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다시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나는 아주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이지. 난 그분을 정말 사랑하고 싶다. … (중략) … 
    나는 하느님 안에서 항상 만족하고 행복하다. 나는 기쁨이건 고통이건 그 모두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그분은 내게 무엇이 제일 좋을지를 아시니까. 이렇게 나는 하느님 안에서 항상 행복하다. 
    나는 그분을 올바로 사랑하려고 노력해. 내가 그분을 그토록 적게 사랑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야. 
    이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이다. 그래, 나는 사랑에 불타는 세라핌 천사가 되고 싶다. 
    나는 좋으신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모든 피조물을 불러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매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때로는 몇 시간씩 십자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같은 편지 안에서 이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썼다. 
    “십자가는 나의 책이지. 십자가는 한번 쳐다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문지기 콘라도는 천국의 문 앞에서 환영을 받다 
    
    1894년 4월 21일, 마지막 순간까지 의무를 다한 파르잠의 콘라도 형제는 “이제 영원을 위하여 준비해야지.” 
    하면서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알퇴팅에 사는 한 사진가는 죽음 자매가 안긴 
    콘라도 형제의 시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콘라도의 유일한 사진이다. 
    콘라도는 빠른 시일에 1930년에 복자가 되어 1934년에 교황 비오 11세로부터 시성을 받았다. 
    
    40년 동안이나 지상에서 하느님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해 따뜻한 대접을 아끼지 않았던 
    거룩한 카푸친의 문지기는 이제 어린양의 천상 잔칫상에서 영원한 대접을 하느님께로부터 받고 있다.
    [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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