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3월 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16:44 ㆍ조회:422 ㆍ추천:0

오늘의 聖人(3월 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t Mary Hofbauer) 축일 3월 15일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연도 1751-1820년
    
     같은이름- 글레멘스, 끌레멘스, 클레멘쓰, 클레멘트  
    
    
     
    체코 동부 모라비아(Moravia)의 타스비츠(Taswitz)에서 1751년 12월 26일 태어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Clemens Maria Hofbauer)의 본명은 얀 드보락(Jahn Dvorak)인데 
    독일 이름인 호프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한인 부모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빵 굽는 기술을 배웠다. 비록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그는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얼마 동안은 로마(Roma)와 빈(Wien)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오스트리아의 브루크(Bruck) 
    근교 프레몽트레 수도원에서 빵 굽는 일을 하다가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신성 로마제국의 요제프 2세(Joseph II)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빈으로 돌아와서 
    다시 빵 굽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Petrus Kunzmann)과 함께 이탈리아 
    티볼리(Tivoli)의 주교 키아라몬티(Chiaramonti, 후일의 교황 비오 7세)의 승낙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빈과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구속주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구속주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 후 교황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폴란드의 바르샤바(Warszawa)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회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자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빈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우르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부터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그에게 높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성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820년 3월 15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888년 1월 29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09년 5월 20일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14년 빈의 사도이자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 클레멘스 호프바우어(St. Clemens Maria Hofbauer, 3월 15일)
    
    가난 · 청빈 · 봉사 · 사랑의 사목자
    1751~1820. 체코 출생 및 오스트리아 선종. 구속주회 사제
     
    성인이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성인 어머니는 슬퍼하는 아들을 성당으로 데려가 십자고상을 
    가리키며 "이제 이 분이 너의 아버지니, 죄를 지어 아버지를 슬프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 후 성인은 예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며 사제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집안이 워낙 가난해 신학교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제빵 기술을 배워 집안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빵을 구우면서도 사제의 꿈을 놓지 않았던 그는 본당 주임 신부님께 틈틈이 라틴어를 배우며 
    사제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단식을 실천하고, 자신의 몫을 떼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20살 땐 은수자가 되겠다며 이탈리아에서 2년 간 은수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 싶은 열망을 이기지 못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대학에 입학, 신학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습니다. 
    1785년에는 구속주회에 입회해 꿈에 그리던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이후 폴란드 바르샤바로 파견된 성인은 헌신을 다해 사목활동에 매진했습니다.
    특히 오갈 데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공부시켰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은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모금했는데, 
    한 손님이 성인에게 침을 뱉으며 모욕적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이를 그저 묵묵히 듣고 있던 성인은 
    자신에게 침을 뱉은 그 손님에게 "제게 주실 것은 다 주셨으니, 이제 아이들을 위한 도움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하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성인은 또 교회를 떠난 신자들이 다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감동적 강론으로 신자들 마음을 움직였고, 가난과 청빈, 봉사와 사랑의 삶을 실천했습니다. 
    그가 주임 사제로 있던 성당엔 점점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성인은 나폴레옹 황제가 수도원을 탄압하고 철폐시킬 때 폴란드에서 쫓겨났습니다.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 정착해 숨을 거둘 때까지 지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학교와 성당, 수도원을 설립하고 
    더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성인은 190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11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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