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15일)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07:53 ㆍ조회:407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15일)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Claude de la Colombiere) 축일 2월 15일  
    신분 신부, 설교가, 활동연도 1641-1682년 
    
     같은이름- 글라우디오, 글라우디우스, 글로드, 끌라우디오, 끌라우디우스, 끌로드, 끌로우드, 
                콜롬비에레, 콜롬비에르, 클라우디오, 클라우디우스, 클로우드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 근교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매우 신심이 깊었고 또 유복한 가문이었다. 유아기에서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지만 
    리옹(Lyon)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수도생활에 대한 강력한 이상에 사로잡혔으나, 
    얼마 동안 이를 억제하다가 끝내는 입회하였다. 아비뇽(Avignon)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보내고 
    다시 철학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5년 동안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이 당시에 아비뇽에는 정치적 불안이 일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이 잘 평정되어 아비뇽 주민들은 평화를 되찾았는데, 
    이때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시성식과 성모 방문 수녀회의 두 수도원이 이 평화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 클로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시성식 때 생애 처음으로 설교하는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의 설교는 대성공이었다. 이어서 파리(Paris)로 가서 신학과정을 마쳤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프랑스의 지성이 한데 모이는 학문적 분위기에 푹 빠졌다. 그는 당시의 저명인사인 콜베르와 친분을 가졌으나 
    수도회 안에서는 별로 친구가 없었다. 사제로 서품된 후에는 아비뇽 대학에서 설교가로 활약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그 후 종신서원을 발하기 전에 행한 대피정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는 특히 예수성심 공경에 전념하였고, 
    예수님의 생애 나이와 같은 33세 때에는 세상에 대하여 더욱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종신서원을 발한 두 달 뒤에 그는 파레이르모니알(Paray-le-Monial)의 예수회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Margarita Maria Alacoque, 10월 16일)를 만나 그녀를 지도하였다.
    
    그의 다음 임무는 영국에서의 선교활동이었다. 영국내의 가톨릭 입장이 최악의 상태에 빠졌을 때 
    성 클로드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영국 가톨릭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공은 많은 반대자들을 만들게 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비록 순교의 영광을 입지는 
    안았으나 영국에서 추방령을 받고 쫓겨나야 했다. 감옥생활로 크게 손상된 그의 건강은 최악의 상태였다. 
    결국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682년 2월 15일에 운명하였다.
    
    흔히 우리는 그의 지성은 예리하였고, 판단은 정확했으며, 예술 애호가였고, 
    프랑스 아카데미의 올리비어 파투뤼와의 친분을 높이 칭송한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92년 5월 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Claudius)로도 불린다.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St. Claude de la Colombiere, 2월 15일)
     
    예수성심 환시 체험한 성녀의 고해사제, 설교가로도 명성
    1641~1682, 프랑스 출생 및 사망. 예수회 사제. 수도원장. 선교사.
     
    성 클로드 드 라 콜롱비에르는 '예수성심의 사도'로 불리며 예수성심에 관한 환시를 체험한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성모방문수녀회) 수녀의 고해사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인은 성녀가 수도생활을 하고 있던 파라이 르 모니알 지방의 예수회 수도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성녀는 당시 환시를 경험했다는 이유로 동료 수녀들에게 비난을 사고 구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녀의 이야기를 들은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성녀의 환시가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인은 이후 성녀의 환시가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성인 역시 예수성심 신심의 
    열렬한 수호자가 돼 이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등 예수성심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1765년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공식적으로 선포했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사제들에게 보내는 성 목요일 교황 서한'을 통해 
    예수성심대축일을 기리며 '사제 성화의 날'로 지낼 것을 권고했습니다.
     
    성인은 생전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거나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은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가 1920년 시성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성녀의 고해사제로만 알려졌던 콜롱비에르 신부의 삶은 그가 남긴 기록들이 밝혀지면서 
    그가 완덕의 경지에 오른 성직자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성인은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7살 때 예수회에 입회했고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성인는 항상 자신이 하느님께 맞는 사람인지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했고 매일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 고민을 기록해 놓은 자료들에선 그의 영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인은 설교가로 명성을 얻어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청교도혁명 이후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확장되던 때에 성인은 가톨릭 정통 교리와 예수성심을 전하며 교회를 떠난 이들의 마음을 되돌렸습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함으로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성인 건강은 크게 악화됐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 곧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199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2월 13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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