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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聖人(4월 25일)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8:42 ㆍ조회:538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25일)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Peter de Betancurt) 축일 4월 25일  
    신분 3회원, 설립자, 활동지역 과테말라(Guatemala) 활동연도 1626-1667년  
    
     같은이름- 베드루스, 베탄커, 베탄쿠르트, 베탕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Petrus de Betancurt)는 1626년 3월 21일(또는 19일) 
    아프리카 북서부 대서양에 위치한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에 속한 
    테네리페(Tenerife) 섬의 빌라플로르(Vilaflor)에서 태어났다. 영웅적인 성덕으로 잘 알려진 
    그의 생애는 복음에 대한 충실함으로 대변된다. 그는 카나리아 제도의 노르만족 정복자들 중 하나인 
    후안 데 베탕쿠르트(Juan de Betancurt)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부모와 가족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얼마 안 되는 양떼를 돌보는 목동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돌보았고, 어린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깊은 명상적 영혼을 갖고 성장했다. 
    그래서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법을 배워나갔다.
    
    서인도 제도(West Indies, 오늘날의 아메리카)에서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그곳에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강력한 소명을 느꼈다. 그래서 24세가 된 1650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자신의 한 친척이 총독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과테말라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준비한 돈은 아바나(Havana)에서 이미 다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부두에서 
    힘든 일을 하며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또 과테말라시티까지 갈 여비 또한 마련해야 했다. 
    이렇게 힘든 여정 끝에 그는 무사히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했다.
    
    당시 너무나 가난했던 그는 하루를 버틸 빵을 얻기 위해 구호품을 나누어주던 프란치스코 수도원 앞에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환대하고 또 일생 동안 그의 상담자가 되어준 
    유명한 선교사였던 페르난도 에스피노(Fernando Espino) 수사를 만나게 되었다. 
    페르난도 수사는 그 지방의 직물공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도 찾아주었다. 
    1653년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그 지방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 들어갔지만 
    학업에 자질이 부족해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다시 한 번 그를 도와 
    이곳에서 장차 그의 고해신부가 되어줄 예수회의 마누엘 로보(Manuel Lobo)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다.
    
    페르난도 에스피노 수사는 그에게 평수사로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세상 안에 남아 살아가길 원하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1655년 
    프란치스코 재속 3회에 입회해 서원하면서 성 요셉의 베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 데 베탕쿠르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된 일과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과 진실한 인류애를 갖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투신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과 비인간적인 노동으로 
    고통 받는 인디오들, 이민자들, 버려진 아이들의 사도가 되어갔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고무된 그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노력했다. 
    1658년 그는 한 작은 오두막집을 얻어, 도시의 병원으로부터 버려졌지만 여전히 간호가 필요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으로 변모시켰다. 이 병원은 ‘베들레헴의 성모님’으로 명명되었다.
    
    그는 노숙자들을 위한 쉼터와 가난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작은 경당도 지었다.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시민들과 교회당국으로부터 모금활동을 펼쳤고, 
    가난한 사제들의 미사 봉헌을 위해 거리에서 기금을 모금하기도 하고, 이른 시간에 봉헌되는 
    미사를 위해 기부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일 때문에 미사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시설 안에 작은 경당도 마련했다. 
    그리고 매년 8월 18일에 그는 어린이들을 모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바치던 
    성모님의 칠락 묵주기도를 암송했고, 이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과테말라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남녀 젊은이들을 모아 조직했고, 이는 후에 베들레헴 형제회와 
    베들레헴 자매회로 발전했다. 그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기도와 절제와 인내에 기초하여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불행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활동 사도직을 포함하는 
    새로운 규칙서도 작성했다. 베들레헴 수도회는 이렇게 설립되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의 영적 묵상의 중심 주제는 ‘베들레헴의 소년 예수’였다. 
    늘 가난한 이들 안에서 소년 예수의 얼굴을 보고 그들에게 경건하게 봉사했던 
    그는 1667년 4월 25일 41세를 일기로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해 안티구아(Antigua)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묻혔다.
    
    성 베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는 이미 1709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1980년 6월 22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2002년 7월 30일 아메리카 대륙 순방 중 사목방문을 위해 과테말라를 찾은 
    같은 교황으로부터 과테말라시티에서 시성되었다. 
    이로써 그는 과테말라뿐만 아니라 중앙아메리카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일생 동안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로 불리며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축일은 성 마르코(Marcus) 복음사가와 겹치는 관계로 전날인 4월 2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 -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제3회 선교회(Franciscan Tertiary Missionary) 회원인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Pedro de San JOse de Betancurt, 1626-1667)는 
    테네리페 섬(Tenerife, 스페인령)의 비야플로레스(Villaflores)에서 태어났다. 
    페드로는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의 정복자 후안 데 베탕쿠르(Juan de Betancur)의 후손이었지만, 
    양치기 소년으로 자나랐다. 그는 젊은 시절 들판과 초원에서 양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점점 더 기도에 정진하여 그리스도와 더 깊은 일치를 이뤄갔다. 
    
    페드로가 31세가 되었을 때, 그는 테네리페 섬에서 양을 치던 일을 그만두고 과테말라(Guatemala)로 갔다. 
    과테말라시티(Guatemala City)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열정으로 길고 몹시 힘든 여정을 
    소화하였다. 페드로가 과테말라시티에 도착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과 
    예수회 회원들이 그를 따뜻하게 환대하며 친구로 맞아주었다. 페드로는 산 보르자(San Borgia)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사제가 되기 위하여 공부하였지만, 중도에서 포기하였다. 
    수도자 생활을 포기한 페드로는 사적 서원을 통해 프란치스코 제3회원(Third Order Franciscan)이 되어 
    성 요셉의 페드로(Pedro of St. Joseph)라는 이름을 받았다. 
    
    1658년, 페드로는 신비가로서 이름을 떨쳤던 마리아 데 에스키벨(Maria de Esquivel)이 살던 빈 오두막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베들레헴의 우리 성모님(Our Lady of Bethlehem)이라고 
    명명한 병원을 설립하고 이어서 그들을 위한 숙소와 학교 그리고 작은 경당을 지었다. 
    페드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의술을 베풀고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인의 자선을 베풀고자 자신을 따르는, 
    마음이 너그러운 젊은이들을 모아 베들레헴 호스피탈 기사단(Hospitaller Bethlehemites)을 조직하였다. 
    그는 과테말라시티의 한 지역에 있는 갈보리(Calvary, 골고타)라고 불리는 건물을 임대하여 
    그곳에 병원을 설립하고 자신이 세운 여러 자선 단체들을 입주시켰다. 그리고 가두모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이곳의 운영비를 충당하였다. 페드로는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경당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건물을 짓고자 그 지역을 방문할 때면, 늘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도복을 입고 갔다. 그리고 그는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의 구령을 위한 기도를 하자고 호소하였고 그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에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사람들로부터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페드로는 매년 2월 18일, 아이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수사들이 바치는 묵주기도(칠락 묵주, Franciscan Rosary)를 합송하였다. 
    또한 그는 포사다(Posada) 축제(만삭이 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숙소를 찾기 위해 수고하는 모습을 
    지현하는 행사)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이는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음으로써 남미 지역 전체에 
    퍼져 나가 오늘날까지도 큰 인기를 끄는 성탄절 행사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성 프란치스코’라고 불린 페드로는 1667년 과테말라시티에서 선종하였다. 
    사람들은 페드로를 그리스도의 음유 시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수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으며, 어렵게 살던 사람들은 그의 너그러운 마음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1709년 그의 시복시성을 위한 심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 6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를 복자로 선포하면서 
    그의 겸손과 헌신 그리고 지극히 복되신 분을 지성(至誠)으로 섬기는 그의 뛰어난 덕을 기렸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르는 수도자들이 하느님 백성을 돌보면서 느끼는 기쁨과 신뢰심 
    그리고 희열이 그의 삶에 잘 드러나 있다고 말하였다. 
    2002년 7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목 방문차 과테말라를 방문하면서 그달 30일에 페드로를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페드로 수사는 그의 고향 땅에서 그리고 수많은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기도에 충실하였습니다. 
    특히 이곳 ‘갈보리의 외딴집’에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매 순간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페드로 수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뛰어난 모범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덕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특별히 기도에 정진하는 것’
    (교황 교서 <새 천년기 Novo Millennio Ineunte> 32항)임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과테말라와 그 외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다시 한 번 간곡히 청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행동을 기도에 초점을 맞추어 여러분의 공동체가 기도의 참된 도량이 되게 하십시오. 
    치열한 삶은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페드로 수사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치열하게 살았으며, 
    특별히 베들레헴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자신의 심오한 영성을 가꾸었습니다.
     페드로 수사는 예수님의 탄생과 소년 시기를 묵상하면서 말씀이 육화된 이 엄청나고 획기적인 사건의 
    근본적 의미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모든 것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용맹스럽게 뛰어들 수 있는 힘을 발견하였습니다.” 
    성 페드로 데 산 호세 데 베탕쿠르트의 축일은 4월 25일이다. 
    - 교회와 역사, 2013년 7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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