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4월 23일) 성 아달베르토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8:35 ㆍ조회:258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23일) 성 아달베르토  
    
    
     
    성 아달베르토(Adalbert) 축일 4월 23일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프라하(Prague) 활동연도 +956-997년  
    
     아달베르또, 아달베르뚜스, 아달베르투스, 아달베르트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또는 아달베르토)는 보헤미아(Bohemia)의 리비체(Libice)에서 출생하고 
    그다인스크(Gdansk)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그데부르크(Magdeburg)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때 그의 스승이자 마그데부르크의 초대 대주교인 아달베르투스의 이름을 따 
    세례명을 보이테크(Vojtech)에서 아달베르투스로 바꿨다. 
    
    981년 스승이 사망하자 선교활동과 성직자 개혁의 원대한 이상을 품고 보헤미아로 돌아와서, 
    이듬해 3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프라하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그는 체코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라하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목적, 정치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로마(Roma)에 
    수차례 사표를 제출하였고, 보헤미아의 대공 볼레슬라프 2세와의 충돌로 인해 로마로 가서 
    '성 알렉시우스(Alexius)와 보니파티우스(Bonifatius)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프로이센(Preussen) 지방의 이교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유럽 북동부 발트 해 
    연안의 평야 지역인 포메른(Pommern)으로 가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쳐 처음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이교도들의 반발을 사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997년 4월 23일 그다인스크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그의 시신은 볼레슬라프 2세에 의해 그니에즈노(Gniezno)로 옮겨졌다가 1039년에 프라하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슬라브 지역 선교에 큰 영향을 끼쳐서 
    슬라브의 사도요 프로이센의 사도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아달베르트 주교 순교자
    
    956년경 보헤미아의 리비체에서 태어났다. 마그데부르크에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견진 때 아달베르트라는 이름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와 사제가 되었고, 
    이어서 983년 프라하에서 2대 주교직에 올라, 이교 관습을 없애는 데 힘썼다. 
    또한 완덕의 삶에 마음을 쏟아, 로마에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마침내 그리스도 신앙을 전파하고자 프러시아에 갔지만, 박해를 받고 997년 4월 23일 순교의 화관을 받았다.
    
    같은 시대의 저자가 쓴 전기에서
    (Act Sanctorum, Aprilis, Ⅲ, pp. 186-187)
    
    그는 온몸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였다
    
    무지한 주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촌장이 아달베르트 성인에게 무엇인가를 다그치자, 
    주민들은 성난 목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성인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 출신인지, 무엇 때문에 그곳에 왔는지 
    추궁을 받고는, 그들과 달리 매우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는 보헤미아 태생으로 이름은 아달베르트이고 수도자입니다. 예전에 주교품을 받았고, 
    지금 여러분의 사도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 여행의 목적은 여러분의 구원입니다. 
    여러분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버리고 여러분의 창조주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시고, 그분 말고 다른 하느님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믿고 생명을 얻어, 
    영원한 낙원에서 천상 기쁨의 상급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달베르트 성인이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곧바로 그들 경멸하며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해 대면서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마침내 그들은 이교도의 광기에 사로잡혀 그와 동료들에게 달려들어 
    사슬로 묶어 놓고 잔혹하게 폭행하였다. 
    아달베르트 성인은 일어서서, 가우덴시오와 묶여 있는 다른 형제에게 말하였다. 
    “형제들이여, 슬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겪고 있는 이것은 다른 모든 덕행을 넘어섭니다. 
    어떤 영예보다 아름답고 말로 다할 수 없이 굳건한 덕행이며 뛰어난 신심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참으로 감미로우신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때 성난 군중 가운데 식고라는 사람이 크게 화를 내며 달려와 엄청난 흉기로 그를 힘껏 찔렀다. 
    그러자 검붉은 피가 양 옆구리의 상처에서 쏟아졌다. 
    그는 팔을 벌리고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였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흉기를 빼내자 일곱 곳에 커다란 상처가 남았다.
    
    사슬을 풀자 그는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리고 주님께 부르짖으며, 
    자신과 박해자들의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를 바쳤다. 
    그리하여 이 거룩한 영혼은 그 감옥에서 해방되고, 
    그 고귀한 육신은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린 채 땅에 쓰러졌다. 
    이렇게 그는 많은 피를 흘려 목숨을 바쳤으니, 
    마침내 복된 어좌에서 지극히 사랑스러우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기뻐할 것이다.
    
    
    
    프라하의 주교 성 아달베르또
    문란한 프라하 시 정화에 안간힘, 프러시아 전교에 힘써 - 축일은 4월 23일
    
    성 아달베르또는 보헤미아성의 한 귀족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영세 때는 보이데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그는 성 아달베르또의 마그데브르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보이데이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아달베르또로 개명하게 된 것은 거기에 재학 중 견진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이후 아달베르또는 981년 성 아달베르또가 승천하자 보헤미아로 돌아왔으며 
    그 이듬해 프라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27세였다.
    
    그러나 겸손한 그는 주교가 되어서도 결코 전과 다른 점이 없었다. 
    이러한 아달베르또의 열심한 선도와 교훈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프라하 시민의 풍기는 무척 문란하였다. 
    그래서 이를 염려한 아달베르또는 교황의 승인을 얻어 주교좌를 물러나 로마의 베네딕또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프라하 시민의 풍기 문란은 계속되어 아달베르또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와 
    풍기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갔다.
    
    그 후 헝가리를 순례하며 전교 활동을 한 아달베르또는 또다시 프라하 시에 귀환토록 명령을 받고 
    출발했으나 도중에서 프라하에서 그의 친척 살해 소식을 듣고 발길을 돌려 폴란드로 들어가 
    친구인 플란드 왕 보레슬라오의 힘을 빌어 프러시아 방면에 전교를 시작해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997년 4월 23일 전교 중 이교인에게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긴 결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축일은 4월 23일이다.[가톨릭신문, 1983년 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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