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3월 18일) 성 치릴로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17:08 ㆍ조회:438 ㆍ추천:0

오늘의 聖人(3월 18일) 성 치릴로  
    
     
    
    성 치릴로(Cyril) 축일 3월 18일  
    신분 주교, 교부, 교회학자, 예루살렘(Jerusalem) 활동연도 315?-387년   
    
     같은이름- 시릴, 시릴로, 시릴루스, 치릴루스, 키릴로, 키릴로스, 키릴루스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로마 제국 황제 가문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듯한 
    성 키릴루스(Cyrillus, 또는 치릴로)는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으며, 342년 또는 그 후에 
    성 막시무스 2세(Maximus, 5월 5일)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았다. 성 키릴루스는 수년 동안 
    예비신자 교육에 전념하다가 350년 또는 351년에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막시무스 2세가 사망하자 
    그를 승계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대한 교계적인 관할권을 주장하던 
    카이사레아(Caesarea)의 아리우스파(Arianism) 주교이던 아카키우스(Accacius)와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주교좌에서 해임되고 유배를 당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성 키릴루스가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여 기근의 희생자들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 재산을 불법으로 매각했다는 누명을 쓴 성 키릴루스는 타르수스(Tarsus)로 갔으나 
    359년 셀레우키아(Seleukeia) 주교회의에 의해 복직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재차 아카키우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티우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다시 복직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성 키릴루스는 367년에 세 번째로 유배되었으나, 발렌스 황제가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에 
    유배된 모든 종교인들을 사면함으로써 석방되어 다시 주교좌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예루살렘의 주교요 교회 박사였던 성 치릴로는 315년경 예루살렘에서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일반 학문을 공부한 후 종교 연구에 전력을 다하여 성서는 물론 교부들의 저서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예루살렘 주교 마카리오에 의해 선발되어 부제가 되었다. 342년경에는 디오클레시아노 박해 때 
    유명한 증거자였던 성 막시모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고 주로 예비자 교육에 전념하였다. 
    특히 348년 사순절과 부활 때 행한 일련의 연설이 우리에게 전해져 4세기 중엽의 신학과 전례를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348년 예루살렘 주교 막시모가 서거하자 350년경 치릴로가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과의 논쟁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에 반대하였으나 체사레아 지방은 아리우스 이단에 물들었다. 
    그러나 치릴로는 체사레아의 주교인 아리우스파의 아카치오로부터 성성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랫 동안 아리우스파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후기 학자들의 증언과 치릴로 자신의 
    저술과 생활로 해명되고 1882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 박사로 선포됨으로써 그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
     
    사실 그는 아리우스파인 아카치오와는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반대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주교 재직 중 
    세 번씩이나(357년, 360년, 367-378년) 추방당하였다. 첫 번째 추방 때는 타르소로 갔으나 2년 후 
    셀레우시아 공의회에서 다시 복직되었다. 그는 재차 아카치오의 음모에 의하여 황제 콘스탄씨오로부터 
    축출되었다가 배교자 율리아노 황제에 의하여 복직되었으나 367년부터 378년까지 다시 유배되는 둥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30여 년간의 주교 생활 중 거의 반은 유배지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표면상 최초의 추방의 원인이 된 것은 빈민 구제를 위해 성당 재산을 매각 처분했다는 것이었다. 
    대흉년 때 빈민들에게 양식을 주기 위해 전례에 필요치 않은 성구를 매각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빈민의 자부(慈父)라고 불리는 그에게는 별로 진기한 일이 아니었으나 이단자들은 
    이를 기화로 독성적 행위로 규탄했던 것이다.
     
    치릴로는 귀양을 가서도 결코 무익하게 세월을 보내지는 않았다. 덕행을 닦고 교구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의 유명한 교리서를 저술하였다. 이 책은 예비자들과 새 영세자들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서로서 교의 및 전례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다. 예비자들을 위해 죄와 용서, 세례, 신앙,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 승천 등 18개 항목에 대한설명이 있고 영세 후 교육으로 사탄을 물리침, 
    세례의 효과, 견진, 영성체 및 미사에 관한 그의 설명은 명쾌하고 설득력 있으며 성서적이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물을 술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어떻게 술을 그의 피로 변화시킬 수 없겠는가 
    하며 성체와 성혈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주교로 있을 때 일어난 두 가지 기적을 증언하였다. 하나는 351년 5월 7일 갈바리아에서 
    올리브산까지 10리 가량에 걸쳐 커다란 십자가가 하늘에 나타나 태양 광채보다 더 빛난 사건인데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은 회개하고 위로를 받았으며, 비신자들은 감동하여 개종하였다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치릴로가 콘스탄씨오 황제에게 보낸 서간에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배교자 율리아노 황제가 그리스도교의 진실성을 부인하고 특히 “이제 돌 위에 제대로 얹혀 있는 
    돌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르 13,2)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궁전을 
    재건하려고 애썼으나 지진이 일어나 그 뜻을 이룩할 수가 없었다. 이는 오히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마태 24,35)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참석하여 아리아니즘을 재단죄하고 니체아 신경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동일 실체(Homo Ousios)라는 말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마체도니우스의 이단에 
    대하여 성령께서도 성부와 성자와 같이 한 천주이심을 의결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387년 3월 18일 72세의 나이로 고요히 눈을 감은 그의 축일은 3월 18일이다.
     
    성 치릴로의 생애에서 보듯이 성인들의 일생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오해와 박해로 수난의 연속일 수 있다. 
    우리도 오해와 멸시와 부당한 압박과 모욕으로 고통당할지라도 신앙으로 잘 참아 이겨야겠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의로 이 땅을 다스리시며 공정하게 만백성을 판결하시는”(시편 9,8) 
    하느님께서 언젠가는 옳고 그름을 밝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경향잡지, 1988년 3월호]
    
    
    
     
                       
  0
100
이름
비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