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3월 9일) 성녀 프란치스카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16:14 ㆍ조회:499 ㆍ추천:0

오늘의 聖人(3월 9일) 성녀 프란치스카  
    
     
    
    성녀 프란치스카(Frances) 축일 3월 9일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로마(Roma) 활동연도 1384-1440년
    
     같은이름- 로마나, 방지가,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랜시스  
    
    성녀 프란치스카 로마나(Francisca Romana, 또는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귀족인 부소(Busso) 가문의 
    파올로(Paolo)와 자코벨라(Giacobella)의 딸로서 이탈리아 로마의 중심부인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3세 때에 인근의 부유한 영주인 폰치아노(Ponziano)의 라우렌티우스(Laurentius)와 결혼하여 40여 년 동안 
    이상적인 결혼생활의 모범처럼 살았다. 그들은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금욕적인 기질이 강하였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 표현하곤 하였다. 
    그래서 흑사병과 내란으로 인하여 사회가 혼란할 때, 그녀는 자선활동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녀는 시누이인 반노차(Vannozza)와 함께 로마의 걸인들을 위하여 조직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여 높은 성덕을 
    쌓아 나갔다. 그녀는 성 알렉시우스(Alexius)의 환시를 본 뒤로 앓고 있던 중병에서 회복되었고, 1400년 그녀의 아들인 
    요한 바티스타(Giovanni Battista)가 태어날 때까지 산토 스피리투(Sancto Spiritu)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또 다시 흑사병과 기근이 로마에 들이닥쳤을 때, 그녀는 이 재앙의 희생자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돕기 위하여 자신의 보석까지 팔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안에 재앙이 닥쳐왔다. 1408년에 대립교황의 편이었던 나폴리(Napoli)의 왕 라디슬라오(Ladislao)가 
    로마를 점령했을 때, 여자들은 남아 있었으나 교황의 편에 서 있던 남편 라우렌티우스는 피신해야만 했다. 
    게다가 폰치아니(Ponziani) 성이 약탈당하고 캄파니아(Campania)의 집도 불에 타버렸다. 
    그리고 1413년의 또 다른 흑사병 때문에 아들 에반젤리스타(Evangelista)가 희생되자 그녀는 자기 집을 
    아예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불행은 계속 이어져 2년 후에는 그녀의 딸 아녜스(Agnes)마저 사망하였다.
    
    1414년경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고, 남편의 추방령도 해제되어 돌아오고 재산도 되찾았지만 남편의 건강은 아주 나빴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그녀의 모범을 따르는 귀족 부인 등과 함께 자선활동을 계속하면서 
    봉쇄생활을 하지 않고 세상 안에서 자선을 실천하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하였다. 
    1433년 3월 25일, 처음에는 마리아의 오블라티회(Oblate di S. Maria)로 알려졌지만 후에 캄피돌리오(Campidoglio) 근처에 
    있는 '스페키의 탑'(Tor de' Specchi) 근처에 있다고 하여 토르 데 스페키의 오블라티회로 알려졌고, 다시 현재의 
    성 프란치스카 로마나의 오블라티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436년에 남편이 죽자 그녀는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성녀 프란치스카는 수녀원에 입회한 후 원장이 되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은 4년 동안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자선 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녀는 수차례나 환시를 보았고, 탈혼에 빠졌으며, 치유의 기적을 행하였고,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그녀는 대이교의 종말을 예언하였다. 그녀는 1608년 5월 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성녀가 밤낮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는데 수호천사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으며, 
    칠흑 같은 로마의 밤거리를 다니는 동안 수호천사가 동행하며 등불로 길을 비춰주었다는 전설에 근거해 
    1925년에 그녀를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그녀는 또한 이탈리아 가정주부와 미망인의 모범으로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St. Frances of Rome, 3월 9일)
     
    이웃 돕는 일, 내 몸 돌보듯
    내란 중에도 무료병원 세우는 등 빈민구제 사업에 열중
    1384~1440. 이탈리아 출생 및 사망. 수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 
     
    성녀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부유한 귀족가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성녀는 어렸을 적 수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 반대로 로마 군인과 결혼하게 됐습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성녀는 부모님 뜻에 순명하며 
    남편과 함께 모범적 가정을 꾸렸습니다.
     
    성녀는 평소 구걸하는 이들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직접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음식을 
    나눠주거나 병원비를 대주곤 했습니다. 성녀의 자선은 부유층 여성들에게 귀감이 돼 점차 많은 여성들이 
    성녀를 따라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나섰습니다. 
     
    하지만 성녀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흑사병으로 자녀 두 명을 잃었고 내란으로 많은 재산을 약탈당했습니다. 
    군인이었던 남편은 한 때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성녀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녀는 내란이 진정되고 약탈당한 재산을 되찾게 되자 병원을 세워 돈 없는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를 펼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여성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이 공동체는 1433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정식 수도단체로 인준 받았습니다. 
    수도회 이름은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오블라티회입니다. 
     
    성녀는 1436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수도회 총장을 맡아 엄격한 수도생활과 자선사업을 병행했습니다. 
    성녀는 생전 많은 환시를 경험했고 치유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녀는 1440년 자신이 예언한 날 선종했고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노바성당에 묻혔습니다. 
    현재 이 성당은 성녀 이름을 딴 산타 프란치스카 로마나성당으로 불립니다.
     
    성녀는 1608년 교황 바오로 4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녀를 자동차 운전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습니다. 
    성녀가 자동차 운전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것은 성녀가 길을 갈 때마다 성녀 수호천사들이 
    항상 길을 밝혀주고 성녀를 위험에서 구해줬다는 이야기 때문입니다. 
    [평화신문, 2011년 3월 6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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