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1월 30일)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4-30 (목) 15:31 ㆍ조회:490 ㆍ추천:0
오늘의 聖人(1월 30일)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Mucian Maria Wiaux) 축일 1월 30일  
    신분 수사, 교사, 활동연도 1841-1917년  
    
     같은이름- 마리아, 메리, 무치아누스, 무키아노, 무키아누스, 미리암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Mucianus Maria Wiaux, 또는 무치아노 마리 위오)는 1841년 벨기에의 멜레(Mellet)에서 
    신심이 매우 깊은 대장장이와 여인숙 주인이었던 신심 깊은 부인의 여섯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15세인 1856년 나무르(Namur)에서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에 입회하여 세례명인 루도비쿠스(Ludovicus) 대신 
    로마 순교자인 무키아누스라는 이름을 수도명으로 받았다. 그는 1858년 히메이(Chimay)와 브뤼셀(Brussel)에 
    잠시 머물다가 말론(Malonne)의 대학으로 부임하여 58년 동안 헌신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삶의 전부를 보냈다.
    
    그러나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에게 이 시간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교육 수도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자신은 재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번외 과목을 가르치고 
    특별한 교수 방법이 필요 없는 일들을 소임으로 맡았다. 비록 그는 책에 쓰인 지식을 전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가장 적은 재능을 그 능력의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은총을 받았다. 각 개인에게 있어 최고의 것을 끌어내는 능력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 수사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삶에 있어서 온화함과 성스러움은 “항상 기도하는 수사”로 인정받는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묘소를 참배하는 관습은 그의 선종 직후부터 생겼다. 
    벨기에에서 그는 하느님과의 중재자로 알려져 사후 20년도 지나지 않은 1936년부터 시성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1977년 10월 30일 동료 수사 성 미카엘 페브레스 코르데로(Michael Febres Cordero, 2월 9일)와 함께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89년 12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의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벨기에의 빛, 
    그의 수도회의 빛”으로 선포하였다. 벨기에의 주교들은 성 무키아누스 마리아 위오에 대해 
    그가 어떠한 신학적, 영적 명제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떠올릴만한 무엇도 남기지 않았지만, 
    일상적인 삶 안에서 그는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 사이에서 사도였으며, 
    매일의 업무를 성덕으로 이행하여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하며 모든 이를 용서했다고 평했다.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 - 미술과 음악을 통하여 복음을 선포하신 분(번역 송영웅 바오로)
     
    성 무치아노-마리 위오(Mucianus-Maria Wiaux, 1841-1917)는 1841년 3월 20일 벨기에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멜레(Mellet)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대장장이였고, 어머니는 집 한 켠에서 까페를 운영하였다.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였던 부모님들은 이 까페를 자신들의 신심에 맞는 방식으로 운영하였고 
    매일 밤 까페 문을 닫을 때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정리하였다.
     
    어린 시절 그 지역의 또래들을 이끄는 대장노릇을 하던 무치아노는 자기 고향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아버지의 대장간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체력적으로 이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의 대장간보다는 1855년 그 지역에 새로 들어온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Christian Brothers)에 
    점점 더 큰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도회가 들어온 그해 본당 신부의 추천을 받아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나무르(Namur)에서 수련기를 마친 무치아노는 벨기에의 말론느(Malonne)에 있는 성 베르티노(St Bertinus) 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처음에 가르치는 일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미술과 음악을 가르치던 동료 수사 막센시오(Maxentius)는 그를 옹호하면서 무치아노를 자기 과목 
    보조교사로 일하게 하였다. 미술과 음악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젊은 무치아노는 성실한 자세로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머지않아 여러 종류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음악과 미술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가르치면서도, 수도원에 들어간 이래 선종할 때까지 
    58년 동안 수도회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였고 성 베르티노 학교에서 교사로서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수업이 없을 때는 본당 교리교사로 또 학생주임으로 봉사하였다.
     
    성 무치아노의 시복식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강론 중에 이렇게 말씀하였다.
     “무치아노의 삶은 단순 소박하였지만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분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일상적 일들을 온 정성을 다하여 하면서 참된 성덕으로 승화시킨 분입니다.”
     
    무치아노는 성체성사 신심과 성모님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러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미술과 음악을 단순히 인간의 심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예술의 한 분야로 보지 않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음악을 통하여 그리고 미술을 통하여 그려내려고 하였다.
     
    1875년부터 1906년까지 그는 끊임없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체적인 허약함조차도 잘 바쳐드리면서 
    그리스도교 교육 수도회 수사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청하면서 한시도 묵주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1917년 1월 무치아노는 약한 체력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병세가 점점 더 심해지면서 1월 29일 그는 성인 호칭 기도를 드리고 나서 동료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음 날인 1월 30일 아침 하느님 품으로 떠났다. 그가 선종한 뒤 즉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도하였는데 
    그의 전구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친절하였고 모든 사람들에게 겸손한 자세로 
    봉사한 이 수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말론느에 그의 유해를 모신 경당을 지었다.
     
    1977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무치아노를 복자로 선포하였다. 1989년 12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시성하면서 이분이야말로 “겸손의 위대한 덕을 모두 갖춘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였다.
     
    “성 무치아노는 그가 깨달았던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성인은 
    동료 수사들에게, 교사들에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겸손되이 봉헌한 한 일생의 참된 결실로 이를 보여 주었습니다.”
    성 무치아노 마리 위오의 축일은 1월 30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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