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4월 30일) 성 비오 5세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9:00 ㆍ조회:510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30일) 성 비오 5세  
    
    
    
    성 비오 5세(Pius V) 축일 4월 30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1504-1572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1504년 1월 17일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 교외 보스코(Bosco)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의 후손으로 원래 이름은 안토니우스 기슬리에리(Antonius Ghislieri)였다. 
    그는 14세 때에 보게라(Voghera)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1521년 5월 18일 수도서원을 하였다. 
    수도명이 미카엘(Michael)이었던 그는 그 후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한 다음 1528년에 제노바(Genova)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이후 파비아(Pavia)에서 16년간 철학과 신학 교수로 재임했으며, 
    1556년에는 바오로 4세(Paulus IV) 교황에 의하여 네피(Nepi)와 수트리(Sutri)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1557년에 추기경이 된 미카엘 기슬리에리는 1566년에 교황 비오 4세를 계승하여 교황에 즉위하면서부터 
    트렌토(Trento) 공의회의 교령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새 "로마 교리서"를 완성했고(1566년), "로마 성무일도"를 개정했으며(1568년), "로마 미사경본"을 
    다시 펴냈고(1570년),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의 전집을 새로 발간케 하는 한편 
    그를 교회학자로 선언하였다(1576년). 
    
    그의 재임기간은 주로 프로테스탄트와 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1570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일치를 도모하였으며,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동맹을 호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베네치아(Venezia)와 
    에스파냐와 함께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1571년 10월 7일 레판토(Lepanto)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이 승리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중재로 여겨 10월 7일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선언했고, 
    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그는 1572년 5월 1일 선종하였고,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672년 5월 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Clemens X)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712년 5월 22일 교황 클레멘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비오 5세(1504-1572)
     
    ‘묵주기도의 교황’으로 불리우는 그는 이탈리아의 보스코 마렌고에서 출생하였다. 
    목동 출신인 그는 어려서부터 수도생활을 그리워하다가, 14살이 되던 해에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고 
    제노바에서 사제가 되고, 여러 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1550년에는 이설(異說) 심문관으로 
    임명되어 이설을 없애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1556년에는 주교, 그 다음해에는 추기경이 되어 
    이설 대심문관이 된다. 그의 목표는 이설과 거짓 교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비오 4세의 선종 이후 19일 간 지속된 콘클라베(교황선거)에서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다. 
    교황 즉위 후, 그는 우선적으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교황의 지위에서도 예전의 검소한 수도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는 종래의 호화스러운 교황청의 의식주를 간단하고 검소하게 하여 교황청을 수도원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는 교황 즉위식을 중지시키고 그에 들어가는 경비를 모두 빈민 구제와 가난한 수도원 원조 등으로 기부하였다. 
    나아가 그는 교황복마저 새로 맞추지 않고, 선임 교황들의 의복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때때로 맨발로 
    로마의 성당들을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일체의 연고자 임용이나 자기 가문에 대해 전혀 특혜를 베풀지 않았고, 
    동물학대와 신성모독적인 일과 매음행위를 규제하였다. 그에 따라 교황청은 도덕과 근면의 모범적인 곳이 
    되었으며, 교황청이 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수도원을 정비하고 신학교를 세웠으며 지방 공의회를 열어 성직자들의 모임을 독려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밀라노에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실행에 옮긴 카롤로 보로메오 추기경이었다. 
    이밖에도 병원을 세워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구제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정기적으로 가난한 수도원에 잔치를 베풀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전례개혁에도 노력하여 큰 업적을 남겼는데, 1568년에 로마 성무일도와 1570년에 로마 미사 경본 등을 
    만들어냈다. 1567년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박사로 공포하고 그의 전집 17권을 출판하였으며, 
    불가타(Vulgata) 성서의 새 출판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 유럽의 그리스도인과 연합하여 그리스도교 세계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지중해를 차지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서쪽 지역까지 팽창하여 교황령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1571년 10월 7일 레판토 해전으로 코린토스 만에서 
    그리스도교 세계인 유럽을 위협한 오스만 제국의 대 함대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래서 이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교황은 승리의 성모 마리아 축일을 10월 첫 주일에 지내게 하였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2세는 “나는 모든 그리스도교 왕국들의 무력에는 꼼짝도 안 하지만, 
    다만 저 교황의 기도의 힘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 윤 클레멘트 신부 [2009년 4월 26일 부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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