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5월 1일) 성 예레미야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9:06 ㆍ조회:341 ㆍ추천:0

오늘의 聖人(5월 1일) 성 예레미야  
    
    
    
    성 예레미야(Jeremiah) 축일 5월 1일  
    신분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연도 650-588년경BC       
     
     같은이름-예레미아, 예레미아스, 제레미  
    
    
    
    성 예레미야(Jeremias)는 구약성서 예언서 중 하나인 예레미야서의 저자이다.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 왕 치세 제13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 중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 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깡그리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민중에게 하느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 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나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 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 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민중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느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 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느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느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민중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 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느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작품명 : 예레미야  작품재료 : 프레스코  소장위치 : 바티칸궁 시스티나 예배당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저는 아이입니다”(예레 1,4-10)
     
    예레미야는 히브리말로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예루살렘 북동쪽 5Km 정도 떨어진 아나돗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힐키야가 사제였으므로 그는 틀림없이 신심 깊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로서 그의 삶은 유년시절의 평온함과 달리, 유다 왕국이 말년에 
    겪어야 했던 격동의 세월처럼 박해와 갈등과 고통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고통의 예언자’로 기억한다.
     
    그는 18세에 예언자 성소를 받았다. 
    때는 유다 임금 요시야의 통치 제13년, 곧 기원전 627년경이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종교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였다.
     
    (구약성서 새번역)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7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다.
    “‘저는 아이입니다’라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9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내 입에 대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너의 입에 내 말을 담아준다 
    10 보라! 내가 오늘 민족들과 왕국들을 너에게 맡기니,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기 위함이다.”
     
    4절의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렇게 내렸다.”는 말은 에제키엘서, 즈가리야서, 하깨서에서도 
    신탁을 끌어들이는 정식(定式)으로 자주 나온다. 이는 주님께서 예언자에게 계시하신 내용이나 
    그분께서 예언자에게 전하라는 메시지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선택하셨다. 삼손(판관 13,51), 세례자 요한(루가 1,15. 41), 
    바오로(갈라 1,15)와 예수님(루가 1,35; 요한 10,36)에게도 태어나기 전부터 이런 ‘성별’이 있었다. 
    하느님께 성별된 예레미야에게 맡겨진 소명은 ‘민족들의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라니! 예레미야서의 내용으로 보아 ‘유다의 예언자나 조금 범위를 넓혀
     ‘이스라엘 전체의 예언자’라야 맞지 않을까? 
    사실 예레미야가 전한 신탁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의 신탁은 
    이따금 아시리아, 바빌론, 이집트 같은 이방 민족들도 대상으로 삼으며(예레 46-51장) 
    유다를 향한 신탁에도 뭇민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세우셨다는 5절의 말씀은 결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더구나 당시의 복잡한 고대 근동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예레미야의 안목을 
    감안할 때 ‘민족들의 예언자’라는 칭호는 그에게 잘 어울린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른다.’고 사양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직 공적으로 활동할 나이(30세 : 루가 3,23 참조)가 되지 않아서 말할 권리나 자격이 없어서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은 단호하다. 
    “내가 너를 보내면 너는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여기서 ‘누구에게나’는 히브리말로 ‘어느 곳에나’와 ‘어떤 환경에나’의 뜻도 들어있다. 
    하느님께 붙들린 자는 사람과 장소와 환경을 스스로 고를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어떤 사람에게 소명을 주실 때, 그와 함께 계시며 함께 사건을 일으키시는 
    ‘임나누엘’이시다(창세 26,24; 출애 3,12; 판관 6,12; 이사 7,14; 마태 28,19-20). 예언자에게 
    맡겨진 임무는 민족들과 왕국들을 “뽑고 허물며 없애고 부수며 세우고 심는” 것이다. 
    앞의 네 낱말은 파괴를, 뒤 두 낱말은 건설을 뜻한다. 예레미야는 먼저 징벌을 알리고(2-25장; 46-51장) 
    그 다음 재건의 희망을 선포한다(30-33장).
     
    예레미야의 예언직은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부르심을 받은 기원전 
    627년부터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까지이다. 요시야가 다스리는 동안 유다는 안정과 번영을 누린다. 
    아시리아가 주변 국가들에 대한 억압의 멍에를 느슨하게 늦춘 틈을 타 요시야는 영토를 넓히고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므기또 전투에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자
     왕국은 급속도로 기울어진다. 바로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을 고발하며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이제 재앙은 피할 수 없다. 
    백성 전체가 잘못된 길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억압하는 자들도 억압받는 자들도, 착취하는 자들도 
    착취당하는 자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5,1-6 참조). 예레미야가 바룩을 시켜 건네준 
    신탁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 천천히 찢어 불에 태우는 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그의 설교가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36장).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587년, 곧 느부갓네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 파괴까지로 예레미야가 
    가장 활발하게 예언직을 수행하던 때이다. 바빌론의 침략으로 그의 예언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다. 
    느부갓네살은 여러 차례 아람과 팔레스티나를 휩쓸고 그 도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유다의 독립이 장애로 드러났다. 이런 절박한 형편에 유다의 지도자들은 
    정세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바빌론의 급부상하는 세력에 맞서려고 이집트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왕실 중심의 친이집트파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바빌론의 
    속국이 되어 자율성을 어느 정도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 
    그의 아들 게달리야,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이 친바빌론파에 속하였다. 제3의 제안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극단 투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독립파’의 주장이다.
     
    이들 사이에서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들었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 장악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가 기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유다를 징벌하시려고 바빌론을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바빌론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한다.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년, 곧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부터 그의 죽음까지이다. 
    바빌론에 유배 가지 않고 본국에 남은 백성은 세 가지 경향으로 갈라진다. 게달리야를 중심으로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한 친바빌론파, 이스마엘을 중심으로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던 자유독립파, 요하난이 이끄는 친이집트파가 그것이다. 
    이 세 번째 부류인 친이집트파는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이집트 망명길에 오른다. 
    예레미야의 흔적은 이 이집트 망명길에서 끊어진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시련을 겪던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소명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은 예외없이 고통을 당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이 시기에 당신 백성과 더불어서 
    고통을 당하신 하느님의 대변인 구실을 해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느님의 대변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그분의 고통을 증언해야 했기에 그들의 삶이 고통으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러운 역사 안에서 가장 고통을 많이 당해야 했던 인물은 예레미야였다.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친구와 친척들에게까지 버림을 받고 극도의 고독 속에 버려져 
    사면초가가 된 그는 자신을 낳은 날과 모태를 저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동족이 철저히 
    파멸되어 가는 처참한 모습을 예고하고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을 괴롭게 지켜보아야 했다. 
    더구나 그가 전한 신닥 가운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토록 성실한 사랑을 쏟았건만 그들로부터 
    배반을 당한 하느님, 사랑하는 그들을 징벌하신 다음 그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안쓰러워하시는 하느님의 고통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평과 원망과 항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의 고백록
    (11,18-12,6; 15,10-21; 17,12-18; 18,18-23; 20,7-18)은 자신의 고통과 동족의 고통과 
    하느님의 고통을 모두 안고 그 고통의 무게에 짓눌린 한 의인의 피맺힌 절규이다.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사도직) [경향잡지, 1999년 1월호]
    
    
    도나텔로의 예언자 예레미야 , Donatello, Prophet Jeremiah, 
    1423-26, Marble, height: 191 cm 
    Museo dell'Opera del Duomo, Florence  
    
    [성경 속의 인물]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격변기의 예언자다. 북 이스라엘은 사라졌고 남쪽 ‘유다국’은 
    주변 강국의 눈치를 보는 민족으로 전락했다. 언젠가 다른 나라에 흡수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유다 왕조의 이러한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인근의 ‘아나톳’ 마을 출신이다. ‘반골기질’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다윗이 죽자 솔로몬은 이복형 ‘아도니야’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당시 대제사장 ‘에브야타르’는 아도니야를 지지했다. 하지만 솔로몬이 승리하자 그는 파면되었고
     ‘아나톳’으로 쫓겨 갔다. 이때부터 이곳은 반체제 마을이 되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제관 계급은 ‘차독가문’이 독식했고 ‘에브야타르’계 사제들은 출세 길이 막혔다. 
    예레미야의 부친은 아나톳에 살고 있던 사제였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 때 나타나 다섯 임금을 섬겼다. 
    17대 ‘여호아하즈’는 요시야의 장남이었지만 이집트 전쟁에서 포로가 된다. 
    이집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을 18대 왕으로 세웠다. 
    그가 ‘여호야킴’이다(2열왕 23,34). 그러나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에게 반기를 들다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19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3달 만에 실각되고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이 20대 임금이 된다. 
    그가 유다의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다(2열왕 24,17).
    
    예레미야 예언의 핵심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민족 ‘바빌로니아’에 대항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설파했다. 
    다시 말해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시야’의 뒤를 이은 4명의 왕들은 모두 예언을 무시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가 
    포로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유다는 더욱 가중한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예레미야의 어원은 ‘이르므야후’(Yirmyahu)에서 왔으며 ‘야훼께서 내던지시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름 자체에서 ‘선택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예언자는 20대 초반에 소명을 받고 
    평생을 오해와 편견과 테러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다. 
    그의 예언이 대부분 왕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야킴이 바빌로니아에 항전하려 조공을 중단하자, 
    예레미야는 성전을 빼앗기게 될 것임을 예언한다. 
    화가 난 왕은 예언자를 가두지만 결국은 네부카드네자르에게 패하고 만다. 
    마지막 임금 치드키야 역시 전쟁준비에 광분하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선동하며 
    반대하다 다시 갇히는 처지가 된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치드키야는 두 눈을 뽑힌 채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신은근 바오로 신부 [2009년 9월 6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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