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4월 3일)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20:33 ㆍ조회:294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3일)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Luigi Scrosoppi) 축일 4월 3일  
    신분 신부, 설립자, 활동지역 우디네(Udine) 활동연도 1804-1884년  
    
     같은이름-스크로쏘피, 알로이시오, 알로이시우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는 1804년 8월 4일 이탈리아 북부 프리울리(Friuli) 지역의 우디네에서 
    신심 깊고 자애심 많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12살 때 그는 우디네 교구의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해 1827년 사제품을 받았는데, 첫 미사를 봉헌할 때 그의 형제인 
    카롤루스(Carolus)와 세례자 요한(Joannes) 신부가 옆에서 그를 도왔다.
    
    1800년대 프리울리는 기근과 전쟁 그리고 페스트로 말미암아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형제인 카롤루스가 운영하던 고아원의 운영을 도와 우디네와 그 주변 지역의 가난하고 
    버려진 소녀들을 모아 교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그의 모든 재물과 힘과 애정을 그들에게 쏟아 부었다. 
    소녀들을 위해 더 큰 시설이 필요해지면 우디네와 인근 지역의 거리를 돌며 구걸하듯이 
    사람들의 지원을 호소하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그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 속에서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인근 지역에서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활동하던 몇몇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여성들은 재봉과 자수에 숙달된 기술을 갖고 있었고, 
    읽고 쓰고 계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연령대와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손길에 이끌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살며 하느님을 섬기고자 했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의 영적 지도를 받으며 봉사하던 9명의 여성들은 마침내 1837년 2월 1일 
    모든 소유에서 벗어나 가난 안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가 설립되었다. 계속해서 다른 이들이 동참했는데, 
    그들은 부자, 가난한 자, 교육 받은 자, 문맹자, 귀족 출신, 비천한 출신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는 이들 모두에게 열려 있었고, 설립자는 그들이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소녀들을 사랑으로 대하도록 격려하며 이끌어 주었다.
    
    그러면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의 가난에 대한 이상과 
    보편적 형제애에 매혹되어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필요성에 대해 고심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그를 기쁨과 자유의 시인, 기도의 성인, 겸손과 사목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성 필리푸스 네리(Philippus Neri, 5월 26일)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이끌었다. 
    결국 그는 1846년 42세의 나이에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에 가입하여 성 필리푸스 네리의 영적 아들이 되었고, 
    그로부터 온순함과 다정함을 배웠다. 이는 그가 하느님 섭리의 수녀회 설립자이자 사제로서 더 합당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수녀들의 자기 개발과 성덕의 성장을 위해 깊은 관심과 존경을 갖고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수녀들의 성소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들이 더욱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때때로 
    그들의 신앙을 시험하기도 했다. 또한 허영과 공명심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고 위선과 천박한 태도를 
    보일 때는 엄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아버지다운 자애로써 수녀들의 약점을 바라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원하고 위로하였다.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베들레헴의 육화에서 드러난 겸손과 가난, 나자렛의 노동자로서의 단순함, 십자가 위에서 바친 온전한 희생, 
    성체성사의 침묵 안에서 수녀회를 이끌 영성의 기초를 만들어갔다.
    
    그는 일생 동안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추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열두 개의 수녀원을 세울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열두 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수녀들은 겸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젊은 소녀들과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늙어 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또한 그는 수녀들이 선의를 지닌 사람들과의 폭넓은 공동 협력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지원하도록 했다. 
    교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협력했던 그는 우디네 신학교의 젊은이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보다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들이 통일의 역사를 걷게 되었다. 정치적 · 군사적 측면에서 이러한 통일은 
    유럽의 북부와 남부, 동부와 서부의 국경이자 교차로인 프리울리 지역 전체에 고통스런 시련을 가져왔다. 
    통일의 결과물 중 하나는 불행하게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였다. 이러한 풍토는 고아원과 오라토리회 사제들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자신들의 활동과 고아들의 선익을 
    지키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했다. 고아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우디네의 오라토리회의 파괴를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성 루이지 스크로소피 신부는 영적인 지혜와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83년 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병마와 싸웠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알고 그는 모든 수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썼다.
     “나의 죽음 이후 수녀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이다. 
    애덕! 애덕! 이것은 수녀회 가족의 정신이다. 영혼들을 구하고 애덕으로 그들을 구하여라.”
    
    1884년 4월 3일 목요일 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러 떠났다. 우디네 전체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서둘러 모였고, 하느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가난하고 어려움 중에 있는 젊은이들의 선익을 위한 그의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일치, 동정과 사랑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금도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걷는 이들의 발걸음에 동행하고 있다. 
    그는 1981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6월 10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는 알로이시우스 스크로소피(Aloysius Scrosoppi)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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