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3월 6일) 성녀 콜레타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15:59 ㆍ조회:311 ㆍ추천:0

오늘의 聖人(3월 6일) 성녀 콜레타  
    
     
    
    성녀 콜레타(Coleta) 축일 3월 6일  
    신분 수녀, 활동연도 1381-1447년
    
     같은이름- 꼴레따, 꼴레뜨, 콜레따, 콜레트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740년 1월 23일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콜레트(St. Colette, 3월 6일)
    수도회 개혁 · 쇄신 앞장서, 세속화된 수도회 규칙 개정 등 운동 펼쳐
    
    1381~1447. 프랑스 출생 및 벨기에 선종. 가난한 클라라회 수녀
    
    성녀 부모는 결혼한 뒤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이들의 수호성인 니콜라스 성인께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드렸고, 
    그렇게 얻은 딸이 성녀입니다. 부모는 니콜라스 성인 이름을 따서 딸에게 니콜레트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주로 애칭인 콜레트로 불렀습니다.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근처에서 살던 성녀는 수도자들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단순하고 거룩한 삶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성녀는 17살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부모님께서 남긴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 뒤, 
    수도원 성당 옆에 집을 얻어 그곳에서 수도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성인을 공경해,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기도와 묵상뿐인 생활로 성녀의 영성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성녀는 성당을 지키며 성당에 오는 이들을 
    늘 반갑게 맞이했는데, 사람들은 가끔씩 성녀에게 고민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성녀는 깊은 영성에서 우러나온 지혜로 사람들 고민에 진심어린 조언을 해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녀를 통해 위로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 영성을 사는 가난한 클라라회에 입회했습니다. 성녀는 매일 기쁘게 생활하고 
    모든 것을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녀는 어느 날 프란치스코 성인 환시를 보게 되는데,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녀에게 수도회가 초심으로 돌아가 좀 더 엄격한 수도생활을 하도록 개혁운동을 일으킬 것을 당부합니다.
    
    환시 후 성녀는 일주일 간 앞을 보지 못하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녀는 프란치스코 성인 말씀을 
    소명으로 받아들여, 수도회 개혁운동에 앞장섭니다. 세속화된 수도회 규칙을 엄격히 개정하고, 
    새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처음엔 성녀의 개혁과 쇄신운동에 반발과 원성이 빗발쳤습니다. 그럴수록 성녀는 겸손하면서도 확고한 의지로 
    이 운동을 진행해 결국 결실을 거뒀습니다. 다른 수도원들도 성녀의 운동에 동참하며 쇄신과 개혁의 길을 걸었습니다. 
    성녀는 1807년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평화신문, 2012년 3월 4일, 박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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