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1월 10일)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4-30 (목) 12:05 ㆍ조회:313 ㆍ추천:0
오늘의 聖人(1월 10일)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Leonie Francoise De Sales Aviat) 축일 1월 10일  
    신분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연도 1844-1914년      
    
     같은이름-방지가, 살레시아,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란치스카, 프랜시스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는 1844년 9월 16일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세잔(Sezann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트루아(Troyes)에 있는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그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준 마리 드 살 샤퓌(Marie de Sales Chappuis) 원장수녀와 
    루이 브리송(Louis Brisson) 교목신부를 만났다.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앞으로 살레시오회의 영성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는 기틀이 되었다.
    
    1866년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화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트루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열정적인 사목자인 브리송 신부는 
    19세기 말에 본격화된 사회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58년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완벽한 인성 교육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센터를 열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으로 알려진 
    이 센터에 적합한 책임자와 안정적인 관리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영감 안에서 수도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는 더 없는 조력자이자 수도생활을 향한 성소를 간직한 레오니 아비아를 발견했다. 
    사실 레오니 아비아는 공부를 마친 후 성모 방문 수도회를 떠났다가 수도자가 되려는 굳은 의지를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브리송 신부와 샤퓌 수녀는 그녀에게 기다리도록 권고했고 그녀는 이에 순명했다. 
    얼마 후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를 자신의 고향인 세잔에서 유리제품을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에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작업장 안에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쉼 없이 일하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 안에서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하며 그들을 상담하고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올랐다. 
    이러한 열정은 브리송 신부가 자신이 트루아에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한 센터에 그녀를 초대했을 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1866년 4월 18일 그녀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학교 동창생 중 하나인 루시에 카뉘에(Lucie Canuet)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에 동참했다. 1868년 10월 30일 젊은 설립자인 그녀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프랑수아즈 드 살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이름은 그녀의 일생의 사업이 무엇일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그룹을 주네브(Geneva) 교구 주교의 보호 아래 두고 이끌었으며, 그의 영성과 교수법의 방법을 
    완벽하게 적용하였다. 그 후 그녀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헌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Oblate Sisters of St. Francis de Sales)로 그 명칭을 정하였다.
    
    1871년 10월 11일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서원을 발하고 새로운 수녀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에 교회법적 인준을 받은 수녀회는 설립자의 지도 아래 급속히 발전하며 사회 사도직을 확장해 갔다. 
    동시에 본당들에 학급을 열고, 파리(Paris)에 젊은 여성들을 위한 첫 번째 기숙학교를 열어 8년 동안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가 교장을 맡았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의 사도직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교육 형태로 확장되었다.
    
    1893년 그녀는 다시 총원장 수녀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책임을 맡았다. 
    그 동안 그녀는 수녀회를 유럽과 남아프리카와 에콰도르에 진출시켜 교육 사도직을 전파하는데 힘썼고, 
    1903년에는 프랑스 내에서 수도회에 반대하는 반종교적인 박해의 시류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수녀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로 본원을 옮겼다. 
    1911년 교황 비오 10세(Pius X)로부터 수녀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았다. 연로한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1914년 1월 10일 페루자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고요함 중에 선종하였다. 
    그녀는 1992년 9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11월 25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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