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3월 17일) 성 요한 사르칸데르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17:05 ㆍ조회:315 ㆍ추천:0

오늘의 聖人(3월 17일) 성 요한 사르칸데르  
    
     
    
    성 요한 사르칸데르(John Sarkander) 축일 3월 17일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체코(Czech) 활동연도 1576-1620년
    
     같은이름- 사르캔더,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성 요한 사르칸데르(Joannes Sarkander)는 오스트리아계의 슐레지엔(Schlesien, 실레지아) 태생으로 
    13세 때에 부친이 사망하자 14세의 어린 나이로 프라하(Prague)의 예수회 대학에 들어가 사제직을 준비하였다. 
    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올로모우츠(Olomouc) 교구장의 눈에 들어서 교구사제가 되었다. 
    16세기에 이 지방은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회원의 도움을 받아 
    이단자의 개종 운동을 전개하여 250명의 개종자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주위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는데, 1618년에 30년 전쟁이 체코 동부 모라비아(Moravia)에서 
    터졌을 때 난리를 잠시 피하기 위해 폴란드의 크라쿠프(Krakow)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본당 신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홀레쇼프(Holesov)로 돌아와 갖은 고초를 겪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는 1860년 교황 복자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95년 5월 21일 체코의 올로모우츠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읽는 성인전
    성 얀 사르칸데르 - 고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받다가 순교한 사제
    
    성 얀 사르칸데르(Jan Sarkander, 1576-1620)는 후스파(Hussites)에 의해 모진 박해를 당한 끝에 순교한 사제이다. 
    사르칸데르는 지금의 체코(Czech) 공화국 슐레지엔(Schlesien) 지역의 스코츠조프(Skoczow)에서 
    1576년 12월 20일 태어나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부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당시 슐레지엔 지역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일어난 분쟁으로 평화롭던 지역이 갈라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거기에다 후스파가 일으킨 전쟁이 길어지면서 보헤미아(Bohemia)와 모라비아(Moravia) 지역은 큰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사르칸데르는 프라하(Prague)에 있는 예수회 대학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교육을 받은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신학교에 들어갔다. 1609년 브르노(Brno)에서 사제로 서품된 그는 신학교 시절부터 거룩한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에 대한 신념으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뛰어난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1613년 그는 보스코비체(Bosckovice) 본당 보좌 신부로 첫 발령을 받았으며 이어 1616년에는 
    올로모츠(Olomouc) 교구 홀레쇼프(Holesov)의 본당 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는 그 도시의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한편 후스파이자 대지주인 비토브스키 본 비스트리트스(Bitowsky von Bystritz)의 끈질긴 
    방해공작과 위협으로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비토브스키 본 비스트리트스는 의도적으로 교회에 해코지를 하려고 
    작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얀은 그와 별 관계를 맺지 않고 사제직에 충실하면서 용감하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회두시키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얀이 예수회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후스파와 보헤미아 형제회(Bohmische Bruder) 
    200명을 회개시키자, 비토브스키 본 비스트리트스는 얀을 용납할 수 없는 원수로 여겨 복수하려고 별렀다. 
    얀이 이러한 사목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그의 후원자는 모라비아의 롭코비츠(Baron von Lobkovic) 남작이었다. 
    
    1618년 발발한 30년 전쟁(1618-1648)은 홀레쇼프와 그 지역의 신자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삼켜 버렸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로 구성된 군대가 승리하면서 홀레쇼프 지방을 점령하자 얀은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한동안 폴란드(Poland)의 크라쿠프(Krakow)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방어능력도 없는 본당 신자들을 
    두고 온 것이 마음 아파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신자들과 함께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후스파가 점령하던 
    홀레쇼프로 돌아갔다. 예상하였던 대로 후스파가 그에게 가하는 어려움은 말할 수 없이 많았다. 
    
    1620년 폴란드 군대가 슐레지엔 지역으로 진군하였다. 그러자 얀은 성체를 모시고 폴란드 군대 사령관을 찾아가 
    홀레쇼프 지역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가게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의 용감한 행동으로 폴란드 군대가 홀레쇼프로 
    진입하지 않아 비극적인 사태를 모면하자 그 도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비토브스키 본 비스트리트스는 이를 역이용하여 복수의 칼을 휘둘렀는데, 얀을 폴란드의 스파이이자 매국노라고 
    고발하면서 폴란드 군대가 홀레쇼프를 점령하지 않고 그냥 둔 것이 그 증거라고 떠들었다. 그리하여 얀은 체포되어 
    올로모츠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로 구성된 재판위원회는 얀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여 
    그에게서 고해 비밀을 알아냄으로써 그를 후원하던 롭코비츠 남작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려고 하였다.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천주교 신자인 판사 요한 신틸라(Johann Scintilla)를 배석시켰는데 
    요한은 이 끔찍한 과정을 모두 적어 프란츠 본 디트리히슈타인(Franz von Dietrichstein) 추기경에게 보냈다. 
    
    형리(刑吏)들은 얀을 고문대에 매달아 놓고 두세 시간을 고문하는 과정을 세 차례 자행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문에도 얀은 고해 비밀을 지키면서 롭코비츠 남자에게 해가 되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화가 난 프로테스탄트들은 그에게 유황과 새털을 온몸에 묻힌 다음 불을 질렀으며, 화상을 더 크게 입히려고 
    여기에 역청과 기름을 퍼붓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얀은 침묵을 지키면서 조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실패한 형리(刑吏)들은 그를 독방에 가두고 거의 한 달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하였다. 
    처참한 고문 끝에 1620년 3월 17일 그가 사망하자 교회는 즉시 그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하였다고 선포하였다. 
    그의 유해는 올로모츠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1859년 복자 교황 비오 9세는 얀 사르칸데르 신부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95년 5월 21일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체코 공화국 올로모츠에서 그를 시성하였다. 시성식에서 교황은 그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얼마나 담대하였는지, 
    그리고 본당 신자들과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에 대한 그의 한없는 사랑을 높이 기렸다. 또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고해 비밀을 지키고자 얼마나 큰 인내심을 발휘하였는지를 상기시키면서 그의 용덕을 극찬하였으며, 
    본당 신자들을 사랑으로 사목하면서 그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려는 결연한 의지와 용기는 그의 거룩한 삶을 
    잘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성 얀 사르칸데르 신부의 축일은 3월 17일이다. 
    [교회와 역사, 2011년 11월호, 번역 송영웅 바오로(봉명학원 재단이사)]
    
    
    성녀 츠디슬라바와 성 요한사르칸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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