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4월 30일) 복자 베네딕토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4 (월) 08:59 ㆍ조회:322 ㆍ추천:0

오늘의 聖人(4월 30일) 복자 베네딕토  
    
    
    
    복자 베네딕토(Benedict) 축일 4월 30일  
    신분 수사, 활동지역 우르비노(Urbino) 활동연도 +1625년    
     
     같은이름-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분도    
       
    이탈리아의 우르비노에서 태어난 베네딕투스(Benedictus, 또는 베네딕토)는 마르코(Marc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페루자(Perugia)와 파도바(Padova)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젊은 법률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 로마(Roma)로 갔으나 
    법조계에서 만족할 수 없음을 알고 포솜브로네(Fossombrone)의 카푸친회에 입회하였으나 
    집안의 반대가 극심하여 1584년에 비로소 파노(Pano) 수도원에서 서약할 수 있었는데, 
    이때 베네딕투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당시 총장이던 브린디시(Brindisi)의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7월 21일)를 수행하여 
    오스트리아(Austria)와 보헤미아(Bohemia) 등지를 3년간 순방하면서 이단자와 타락한 가톨릭 신자들을 
    상대로 설교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높은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는 하느님의 집을 보살피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고 주로 주님의 수난을 설파하였다. 
    그는 하루 한 시간씩 땅에 엎드려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밟으신 땅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625년 그는 매우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사소 코르바로(Sasso Corbaro)에서 사순절 강론을 하여 
    건강이 악화되더니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포솜브로네에서 선종하였다. 
    베네딕투스가 즐겨 한 말은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든든한 ‘빽’ 덕분에 파면에서 벗어난 병약한 수련자, 
    우르비노의 복자 베네딕토(Blessed Benedict of Urbino, 1560-1625)
    
    “이 문으로 쫓겨나면, 다른 문으로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카푸친들의 입회 과정이 비록 매우 공정타하더라도, 때로는 ‘빽’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이것은 한 유명한 카푸친 수련자에게 일어난 경우였다. 수련기 동안 그 형제는 
    건강 문제 때문에 수도회에서 쫓겨날 뻔했는데, 이에 그는 크게 항의했다. 
    “이 문으로 쫓겨나면, 다른 문으로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기도했고 그의 병은 나았다. 
    하지만 서약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혹이 있었다. 관구봉사자는 그를 폐결핵 환자로 보았고, 
    카푸친 서약자의 터프한 생활을 제대로 못 해 낼 것으로 판정했다. 지역 형제회의 다수의 형제들도 
    그를 부적격자로 여겨 그에게 반대투표를 했다. 그렇지만 수련장은 총봉사자에게 편지를 보내 서약을 
    허락해줄 것을 청원하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수련장을 잘 알고 있었던 그 총봉사자는 그 허락을 승낙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총봉사자의 ‘빽’ 덕택에 카푸친으로 서원을 발할 수 있었던 그 수련자는 
    오늘날 카푸친회에서 ‘우르비노의 복자 베네딕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카푸친회 입회하려고 궁전 생활을 포기하다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 훗날 우르비노의 베네딕토 형제 - 마르코 파시오네이(Passionei)는 
    도미니코 파시오네이와 막달레나 치보(Cibo) 사이에서 1560년 9월 13일, 이탈리아 우르비노(Urbino)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11명의 남매 중 일곱째였다. 페루자 파도바의 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그는 1582년 
    만 22살 밖에 되지 않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국법 및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을 하고 나서 로마에 위치한 베드로 히에로니모 알바니(Albani) 추기경의 궁전으로 일하러 다녔는데, 
    궁전 생활양식이 역겨워 금방 그 일자리를 그만두었다. 
    
    마르케(Marche) 지역으로 돌아간 그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를 신청했다. 1584년, 그는 베네딕토라는 
    수도명을 받고 파노(Fano)에 있는 성녀 크리스티나의 수련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몇 달 후 
    건강이 안 좋아서 포솜브로네(Fossombrone)의 카푸친 형제회로 이동되어야 했다. 건강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585년 5월 베네딕토 형제는 총봉사자의 특별 허가로 서약을 마침내 하게 되었다. 
    
    개척하는 선교사 
    
    사제서품을 받은 1590년에 그는 열정적으로 설교 봉사 직무에 헌신했다. 일반적으로 그는 외딴 시골마을들에서 
    설교하기를 좋아했지만, 가끔 페자로(Pesaro)와 우르비노와 제노바(Genoa)와 같은 큰 도시들에서도 
    설교를 해야만 했다. 1600년도 총봉사자인 카스텔페레티(Castelferretti)의 히에로니모 형제는 
    그를 보헤미아(현 체코 공화국)에 선교사로 보냈다. 브린디시의 성 라우렌시오가 단장이었던 선교단원으로써 
    그곳에서 그 나라 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생활을 북돋아 주었다. 
    
    설교하다가 죽을병에 걸리다 
    
    1602년 본 관구로 돌아왔고, 그때서부터 그는 파노와 예시(Jesi), 포솜브로네와 칼리이(Cagli), 
    페자로와 우르비노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들에서 설교자, 수호자, 일반 형제, 동냥자로 활동했다. 
    
    1625년 사순 때에 사코코르비로(Saccocorvaro)에서 설교하다가 그는 탈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1625년 5월 30일,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나이는 만 65세였고, 
    41년간의 수도생활을 채우고 있었다. 1867년, 복자 비오 9세 교황은 베네딕토 형제에게 시복을 베풀었다. 
    
    “주님의 성인성녀를 존경합시다. 몸과 영혼을 둘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소멸되는 마련이면 몸이 소멸되게 합시다.” - 우르비노의 복자 베네딕토
    [출처 : 카푸친작은형제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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