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18일) 성 테오토니오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3 (일) 08:20 ㆍ조회:333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18일) 성 테오토니오  
     
    성 테오토니오(Theotonius) 축일 2월 18일  
    신분 수도원장, 활동지역 코임브라(Coimbra) 활동연도 +1162?/1166년?  
    
     같은이름- 떼오또니오, 떼오또니우스, 테오또니오, 테오또니우스, 테오토니우스 
    
    
    
    성 테오토니우스(또는 테오토니오)는 포르투갈 중부 코임브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의 
    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사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사제가 된 뒤에는 주로 본당사목을 하였는데, 
    매우 엄격한 생활과 높은 성덕 때문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얼마 후 그는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였고, 
    포르투갈의 황녀와 백작이 그를 주교로 영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이를 거절했다. 
    두 번째로 성지를 순례한 뒤 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회가 코임브라에 세운 새 수도원에 입회하여 장상을 역임하였다. 
    그를 지극히 존경하던 국왕 알폰수스는 성 십자가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희사하였다. 
    그는 80세까지 30여 년 동안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167년 포르투갈의 주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후에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 1740-1758년 재임)에 의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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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테오토니우스(1086-1166)
    
    포르투갈의 간페이(Ganfei)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날 때부터 경건함의 의미인 테오토니우스라는 
    이름을 갖는데, 포르투갈의 중부지방인 코임브라의 주교였던 크레스코니우스(Cresconius)의 
    외조카로서 어린 시절부터 읽고 노래하는 교회의 공부를 시작했던 포르투갈의 첫 번째 성인이다. 
    사제로 서품되기 전에 그의 외삼촌 크레스코니우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삼촌인 테오도리코(Teodorico)가 
    수도원장으로 있던 복되신 동정마리아 교구로 거처를 옮기고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한다. 
    사제가 되기 전부터 그는 매우 근면하고 신심이 깊었다고 한다.
    
    사제가 되고나서부터 그의 생활은 놀랄만한 충실함으로 영혼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그는 사치와 화려함, 
    교만과 야망, 그리고 세상적인 즐거움 등을 모두 피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방 안에서 쉬거나 앉는 
    편안한 침대와 의자 등도 모두 거두었다. 그리고 여성들과의 만남이나 현명하지 못한 친밀함 등도 삼갔다. 
    그의 거룩함과 도덕적 순수함의 명망은 그가 속하여 일하던 바이서(Viseo) 교구의 귀족과 서민, 
    남자와 여자 등의 모든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서적, 제의, 종, 십자가, 성작, 
    그리고 성서 등의 거룩한 사업은 더욱 풍부하게 했다.
    
    그는 여러 번 바이서 교구의 성직자들의 추천, 교구민의 요청, 그리고 여왕인 데레사 등의 청원으로 
    주교가 되어 달라는 제의를 받지만 번번이 거절한다. 그는 마침내 주교좌 성당 참사회 원장으로서의 
    직무마저도 사임하고서, 1116년에는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난다. 성지순례에서 돌아온 그는
     더욱 거룩한 사제성무에 정진하는데, 매주 토요일에는 천주의 모친 마리아께 대한 신심미사를 봉헌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성 미카엘 성당에서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고 묘지까지 행렬을 하여 
    많은 귀족가족들이 참여하고 헌금을 했는데, 그는 그 헌금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다.
    
    그는 1126년에 두 번째로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그는 특별히 갈바리아 
    제대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울었다. 그는 더욱이 예수님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 
    그리고 십자가의 길 등의 신비들을 묵상하며 머물렀다. 이때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묵상은 
    그가 ‘십자가의 수도회’를 선택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마침내 그는 1132년 2월 24일 재의 수요일에 왕과 
    많은 사람들이 모인 데에서 코임브라(Coimbra) 교구의 주교로부터 성 아우구스틴회의 규율을 따르는
     ‘성 십자가 수도회’의 수도복을 받는다.
    
    그는 수도원장으로 30년간을 봉사하는 동안 수도회 형제들의 관상적이고 영적인 돌봄과 인도자로서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도 마치 마르타와 같이 헌신하는데, 그 의 겸손은 아빠스 등의 칭호를 끝까지 거절한다. 
    그의 성덕과 삶은 겸손, 거룩함, 불타는 신심 등으로 말하여 지는데, 그는 자신의 형제들과 모든 이에게 
    친절, 영예, 존중, 단정함, 아 버지와 같은 자애심, 좋은 판단 등으로 대하곤 했다. 
    특별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고 나쁜 영을 쫓아내는 기도를 
    드리는 데에 탁월했다. 그는 80세이던 1162년 2월 18일에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데,
     ‘그의 육신이 무덤에 내려가기 전에 그의 영혼은 벌써 하늘에 도달했다’고 전하여졌다.
    -2013년 2월 24일 사순 제2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윤 클레멘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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