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4일) 성 요한 데 브리토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4-30 (목) 20:10 ㆍ조회:325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4일) 성 요한 데 브리토
    
     
    
    성 요한 데 브리토(John de Britto) 축일 2월 4일  
    신분 순교자, 활동연도 1647-1693년   
    
     같은이름-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포르투갈 리스본(Lisbon) 출신의 예수회원인 성 요한(Joannes)은 1673년에 
    인도 선교사로 파견되어 주로 마두라(Madura) 지역에서 선교하였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주민들의 언어와 관습을 따르려고 노력하였으나 
    끝내 죽음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마라바(Marava) 지방의 어느 개종자가 
    자기 아내들을 포기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곳은 일부다처주의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박해가 일어났다. 
    결국 그는 오리우르(Oriyur)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1852년 2월 17일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47년 6월 2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데 브리토 (예수회의 성인들) 
    
    성 요한 데 브리토는 1647년 3월 1일 리스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요한이 9살이 되던 해, 미래에 국왕 베드로 2세가 되는 왕자를 시중들기 위해서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1662년 12월 17일, 부모, 왕, 왕자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예수회에 입회했으니 그의 나이 15세였다. 
    
    1673년 2월에 서품을 받자마자 예수회 입회 때부터 원하던 인도 선교를 위해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뒤를 따르는 것을 성소의 핵심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요한 데 브리토 신부는 1673년 3우러 25일 리스본을 출항하여 9월 4일에 고아에 도착하였다. 
    고아에서 나머지 신학을 공부한 후 제3수련을 받던 중 마두라이로의 파견을 준비하기 위해 타밀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마두라이의 북동쪽에 위치한 콜레이라는 마을의 본당으로 파견되었다. 
    콜레이로 향하던 도중 주임신부의 권유로 당시 힌두교의 구루들이 입던 진노랑색의 펑퍼짐한 승복으로 
    바꿔 입었는데 이는 앞으로 그의 선교사로서의 삶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콜레이에 도착하자마자 언어 공부는 물론 구루들의 생활 습관(식사 습관, 앉는 습관, 기도하는 방법 등)을 
    익히는데 힘썼다. 이것은 그의 전임자요 명망이 높았던 로베르토 데 노빌리 신부가 1605년부터 약 50년 간 
    마두라이에서 취했던 선교 방법을 따르는 일이었다. 당시 예수회는 적응주의적인 원칙, 
    즉 선교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리토 신부는 노빌리 신부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임했다. 노빌리 신부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면, 브리토 신부는 본당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제한을 넘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심지어는 불촉 천민들조차도) 
    차별 없이 만나는 것 때문에 그 지역의 통치자들이나 승려(브라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교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마두라이에서 11년 동안 지내면서 그는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마지막 2년은 그 지역의 장상으로 일했다. 1686년 5월 입국이 금지되어 있던 마라바 지역으로 들어갔다. 
    잠시의 선교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개종자가 생겨났다. 그러나 선교활동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6명의 협력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겪은 후에 추방당했다. 다시 마두라이로 돌아와 
    곧 프로크라토르(예수회 총회에 참석하는 대의원)로 뽑혀 유럽의 교회에 인도의 선교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는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구루의 옷을 입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국왕이 된 베드로 2세가 브리토 신부를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두고 싶어 했으나 이를 사양한 
    브리토 신부는 1690년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1692년 위험을 무릅쓰고 마라바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당시 마라바 지방의 왕자가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브리토 신부 협력자의 지극한 간병으로 병이 치유되자 왕자는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왕자 전처의 모략으로 브리토 신부는 다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693년 2월 4일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가 처형된 후 마두라이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번창하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사제직을 지망하게 되었다. 
    1858년 8월 21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려지고 1947년 6월 22일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기념일은 2월 4일. (이냐시오의 벗들, 2012년 6월호, 구정모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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