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7일) 복자 비오 9세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4-30 (목) 20:45 ㆍ조회:326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7일) 복자 비오 9세
    
    
    
    복자 비오 9세(Pius IX) 축일 2월 7일  
    신분 교황, 활동연도 1792-1878년     
    
     같은이름- 비우스, 피오, 피우스  
    
    
       
    1792년 5월 13일 이탈리아 안코나(Ancona) 근처 세니갈리아(Senigall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Ferretti)는 1803년 볼테라(Volterra)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간질병을 얻어 180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로마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19년 4월 1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때 그는 예수회 회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포기하고 로마의 타타 조반니(Tata Giovanni) 고아원에서 
    사제로서의 첫 활동을 시작하였다.
    
    1822년부터 1824년까지 칠레와 페루의 교황대사인 무치(G. Muzi) 주교를 보좌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이해와 사도적인 열성을 얻고 돌아온 그는, 1825년부터 1827년까지 로마의 산 미셸(San Michele) 구호원의 
    관리 책임을 맡았으며, 1827년에는 스폴레토(Spoleto)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반성직주의와 교황의 세속권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이몰라(Imola) 교구의 교구장으로 
    전임되었다. 개혁에 대한 그의 입장은 1833년에 라벤나(Ravenna)의 대주교 팔코니에리(Falconieri) 추기경에게 
    보낸 서한과 1845년에 작성하여 로마로 보낸 “교황령 행정에 관한 고찰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당시의 자유사상과 행동을 배격하면서 바른 그리스도교적인 환경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조반니 마리아는 1846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 1831-1846년)가 
    사망했을 때는 후보자로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나, 그레고리우스 16세의 체제를 계승하려는 보수파들의 대표자인 
    람브루스키니(L. Lambruschini) 추기경이 교황이 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이들에 의해 교황 후보자로 강력히 부상되었다. 
    그리고 교황 선거가 시작된 지 이틀 만인 1846년 6월 16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 교황(1800-1823년)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비오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는 1846년 회칙 “퀴 플루리부스”(Qui Pluribus)를 통해 사제 지원자들의 엄격한 선발과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같은 해에 수도회성을 설립하여 수도회의 개혁을 촉진하였다. 1848년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이탈리아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적 단합을 지지하였으나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거부하여 이탈리아 혁명군에게 쫓겨 교황청을 떠났다가 프랑스군이 로마를 함락했을 때 다시 돌아왔다.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대칙서를 통해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선포함으로써 마리아 신심을 
    증진시키고 신학적 발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를 포기하였고,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1859년 로마냐(Romagna) 그리고 1860년에는 움브리아(Umbria)와 마르케(Marche)를 
    잃었고 1870년 9월 20일 이탈리아 군대가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고 이듬해 일방적으로 ‘보장법’을 발표함으로써 
    교황의 모든 세속주권을 빼앗겼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영성 및 교회문제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성과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년)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
    는 또한 현대의 합리주의, 범신론, 종교적 자유주의와 반가톨릭적 형태의 현대철학들을 단죄하여 
    가톨리시즘을 수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그는 이탈리아 정부와 더 멀어졌고, 
    공의회의 결과로 발생한 이교인 구가톨릭교(Altcatholizismus)와 서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반성직주의 운동을 목격하였다. 
    한국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 비오 9세는 재위중인 1857년 조선 순교자 82명을 가경자로 선포하였고, 
    1866년 초 조선에 병인박해가 발생했을 때 그 해 12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교우들을 위로하고 박해를 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언약된 보상을 상기시키기도 하였다. 
    
    그는 정치적이지도 외교적이지도 않았으며 본질적으로 사목자였다. 하지만 그가 재임할 때의 역사적인 상황, 
    즉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국가 통일 운동)의 시기는 그를 정치와 연루시켰다. 
    그는 정치적으로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고 근대 세계와 문명에 대한 이해 또한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성과 교회의 엄격한 수도회의 부활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반얀센주의 신심을 일깨우고 
    재속 성직자와 수도자를 개혁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세속화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였고, 
    교회 특히 교황의 자주와 독립을 확립하였다. 1878년 2월 7일 사망한 교황 비오 9세의 유해는 
    1881년 7월 13일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 로렌조 성당(San Lorenzo fuori le Mura)으로 옮겨졌으며, 
    1985년부터 그의 영웅적인 삶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함께 시성을 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는 2000년 9월 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시복식에 참여한 약 10만 명의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비오 9세 교황에 대해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으며 언제나 하느님과 영적인 가치들을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었다”면서 
    “그분은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증오와 비방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교황 비오 9세는 1700년 이후 최연소 교황이었으며 베드로 사도 이후 가장 오랜 기간(32년)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교황편- 비오 9세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 선포
    정신적 영적 지도자의 입지 굳혀
    조선순교자 82위 가경자로 선포
     
    조선교회 제3대 대목이었던 페레올 주교는 1847년 김대건 신부 등 박해를 통해 숨져간 수많은 순교자들의 
    전기를 작성, 로마에 보내게 된다. 조선 순교자들의 거룩한 죽음을 알려서 이들을 시복 대상에 오르게할 목적이었다.
    기록을 전해받은 교황청은 이례적으로 조선 순교자들을 대우했다. 즉 당시 교황 비오 9세는 박해상황의 조선교회를 
    배려해서 시복절차에 필요한 최초 심리를 페레올 주교의 기록으로 대신할 수 있도록 조처를 내린 것이다. 
    이를 통해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수속이 정식으로 접수되었고 결국 1857년 순교자 82명이 가경자로 선포됐다.
    이같이 한국교회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교황 비오 9세(1846~ 1878)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이란 최대의 두 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공의회를 세계사와 교회사에 중대한 의미의 
    사건으로 기록시킨 인물이다.
     
    본명이 조반니 마리아 마스타이 페레티(Giovanni Maria Mastai -Ferreti)였던 비오 9세는 1819년 사제서품후 
    1840년 추기경으로 임명됐으며 1846년 그레고리오 16세의 뒤를 이어 교황직에 올랐다. 
    「비오」 이름은 이몰라의 주교였던 비오 7세(1800~1823) 교황에 대한 경의를 표시한다는 뜻이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비오 9세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히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 1870)는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가톨릭 교회 및 
    교황의 권위 약화 현상과 더불어 1848년 발발한 이탈리아 혁명으로 교황령이 통일 국가 건설에 장애물로 여겨지는, 
    반가톨릭적 반교황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사회적 배경과 무관치 않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얀센주의 등에 대응하여 
    교황권 강화를 내세운 「교황 지상주의」가 서유럽 성직자들과 평신도 지성인들 사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같은 신교황주의를 내세운 신자들은 강력한 교황 중앙집권 체제를 주장하며 교황이 없는 가톨릭교회는 
    존재할 수 없음을 역설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공의회 개최에 앞서 1854년 「성모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한 비오 9세는 교리 선포를 통해 이미 공의회 소집을 
    암시했다고 볼 수 있다. 교리 자체가 교황의 무류권 방식으로 선포되었고 또한 이 무류권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최대 테마로 부상했기 때문이었다.
     
    「영원한 목자」 헌장을 통해 선포된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의 요지는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교회의 최고 우두머리로서의 교황은 전 교회와 모든 교구에 대해 완전한 주교권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 권한에는 
    신앙 도덕 문제와 더불어 규율과 통치문제가 포함되며 그러므로 모든 주교는 신앙과 도덕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교회 통치 문제에 있어서도 교황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포함한다. 또한 교황이 권좌에서 
    어떤 발언을 하면 그 결정은 교회 동의에 의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르칠 수 없고 또 변경될 수 도 없다.
     
    교황령 붕괴, 속권 상실
     
    이 선언은 차기 교황들의 정책을 결정짓는데 중대한 영향을 낳았고 또 교황령 붕괴, 교황의 속권 상실 등 
    문제가 빚어진 시점에서 교황의 영적 권위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보였다. 교황이 세속 군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로, 교회안에서는 영적지도자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이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독일 프랑스 사이의 전쟁, 그리고 이탈리아 군대의 로마도시 점령 등으로 
    교회의 중요 문제를 계속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일찍 정회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 결속력을 높이고 로마가 세계 교회 중심지임을 재삼 천명하는 기회였다.
     
    여러 국가에서 구(舊) 가톨릭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비오 9세의 위상은 새롭게 강화됐으며 
    영국 가톨릭 교계제도가 다시 설정되고 종교개혁으로 파괴됐던 네덜란드 교계 제도 역시 새롭게 설정되는 
    모습들이 뒤따랐다. 특히 미국교회의 경우 활기를 되찾는 것과 함께 새로운 교구가 설립되는 변화가 일었다.
    비오 9세는 앞서 언급된대로 교황령의 붕괴를 지켜봐야 했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교황령 대부분이 상실되고 로마만이 프랑스 군대의 도움으로 교황령에 머물러 있던중 1870년 보불전쟁이 
    터지면서 피에몬테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 교황령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비오 9세는 바티칸 궁으로 
    물러나게 됐고 침략자들에게 엄중 항의와 함께 파문 조치를 내렸으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1871년 5월 13일 이탈리아 새 정부는 소위 「보호법」을 공포, 교황청 문제를 일단락 짓고자 했으나 비오 9세가 
    이 법을 거부하면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교황은 칙서를 통해 정부가 시행하는 선거를 
    거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같은 조처들은 결국 선의를 가진 가톨릭 정치인의 현실 참여를 막게 했고 반교회적 
    과격파의 집권을 초래했다. 이 문제는 후에 무쏠리니와 교황 비오 11세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됐다.
     
    1857년 한국 순교자들의 가경자 선포후 1866년 조선교회가 또다시 박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 서한을 보내기도 했을 만큼 조선교회에 애정을 보였던 교황 비오 9세. 
     
    그의 재위기간은 한마디로 「투쟁과 타협, 전진의 시대」 였지만 19세기 재임 교황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격변기 사회 상황속에서 새로운 사상의 도전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는 약점과 세속권의 상실로 교황권이 치욕스런 국면을 맞는 시기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등을 통한 교황의 대내적 활동들은 새로운 세기를 앞둔 가톨릭 교회에 전진과 도약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역사가들은 밝힌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29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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