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聖人(2월 14일) 성 메토디오
ㆍ작성자:사이버사목 ㆍ작성일:2015-05-01 (금) 12:57 ㆍ조회:376 ㆍ추천:0
오늘의 聖人(2월 14일) 성 메토디오
    
     
    
    성 메토디오(Methodius)  축일 2월 14일  
    신분 대주교, 선교사, 활동연도820/825?-885년  
    
     같은이름- 메토디우스
    
     
       
    성 키릴루스(Cyrillus)와 그의 형인 성 메토디우스(또는 메토디오)는 그리스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어린 나이에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의 왕립 학교에 보내져서 성 포티우스(Photius, 2월 6일)의 
    문하생으로 공부하다가 사제가 되었으며, 그 후 그 대학에서 스승 성 포티우스를 능가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성 메토디우스는 옵시키온(Opsikion) 지방의 슬라브 식민지 가운데 한 지역을 맡는 총독이 되었다가 
    사직한 후로는 은수자가 되었다.
    
    이들 형제는 보스포루스(Bosporus)의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는데, 황제 미카엘 3세가 러시아의 
    드니에프르(Dnieper) 강과 볼가(Volga) 강변에 사는 카자르족(Khazars)을 회개시키도록 파견하자 
    그들은 카자르 언어를 배워 수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선교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성 키릴루스는 이후 몇 달 동안 교황청립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성 메토디우스는 
    소아시아 헬레스폰트(Hellespont)의 폴리크로니온(Polychronion)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Moravia) 왕국의 왕 로스티슬라프(Rostislav)의 요청에 따라 성 포티우스 주교는 
    성 키릴루스와 성 메토디우스를 모라비아인들의 개종을 위해 파견하였다. 비록 그들을 개종시키는 
    일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두 형제의 슬라브어 실력은 대단하였다. 성 키릴루스는 
    선교를 위해 성서를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그리스 문자에 기초하여 슬라브 알파벳을 만들었다. 
    최종 확정된 키릴 문자는 아직도 현대 러시아어와 많은 다른 슬라브 언어의 알파벳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 키릴루스는 성 메토디우스의 도움으로 복음서와 시편, 바오로 서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고,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독일 성직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동안 라틴어만 사용하던 
    교회의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한 것과 또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왔으므로 
    혹시 서방교회의 이단의 일파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파사우(Passau)의 
    독일 주교가 사제 후보자 선발을 거부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에 치명적인 해를 끼쳤다. 
    이 사건으로 두 형제는 교황 성 니콜라우스 1세(Nicolaus I, 11월 13일)로부터 소환되었는데 
    그들이 로마(Roma)로 가던 중에 교황이 서거하였다.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하드리아누스 2세(Hadrianus II)는 두 형제의 방문에 매우 호의적이었고, 
    두 형제는 크림(Krym) 반도에서 서거한 교황 성 클레멘스 1세(Clemens I, 11월 23일)의 유해를 인도하여 
    교황의 따듯한 영접을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그들의 정통성을 확신하게 되었고 
    또 전례에서 슬라브어 사용을 인가하였다.
    
    그들이 로마에 머무는 동안 성 키릴루스는 수도자가 되었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모라비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869년 2월 14일 수도원에서 운명하여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한편 성 메토디우스는 교황 특사로서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돌아갔다. 
    하드리아누스 2세 교황은 모라비아와 판노니아(Pannonia)를 독일 교계제도에서 독립시켜 대교구로 승격시켰고, 
    성 메토디우스를 판노니아와 모라비아 지방 전체를 관할하는 시르미움(Sirmium)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870년 독일의 왕 루드비히 2세와 독일 주교들은 라티스본(Ratisbon,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 시노드에서 
    성 메토디우스를 쫓아내기로 결정하고 그를 가두었다. 그는 3년간 스바비아(Swabia)에서 귀양생활을 
    하다가 교황 요한 8세(Joannes VIII)의 중재로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 교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요한 8세 교황은 슬라브 지역에 대한 사도좌의 관할권을 지키기 위해 전례에서 슬라브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제한적인 개정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계속 적대적인 시선으로 성 메토디우스의 활동을 지켜보던 
    독일 교회는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그의 정통성을 문제삼아 성 메토디우스를 이단자로 고발하였고, 
    880년 그는 로마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교황에게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과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뛰어난 변론을 한 끝에 결국 교황은 교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를 통해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전례에서의 슬라브어 사용을 다시 인가하였다. 
    882년 교황의 뜻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성 메토디우스는 제자 두 명의 도움으로 
    동생의 뒤를 이어 성서와 그리스어로 된 교회법전을 슬라브어로 번역하였다.
    
    독일 교회와 성 메토디우스 간의 투쟁은 그의 일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결국 그 모든 투쟁은 그가 건강 악화로 인해 885년 4월 6일 파스카 목요일에 자신의 주교좌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그는 참으로 힘든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성 메토디우스와 성 키릴루스는 ‘슬라브 민족의 선교사’로 불리며, 
    동유럽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서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가 행한 전례는 
    오늘날의 러시아 전례가 되어 러시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그대로 전해온다. 
    그들의 축일이 전 세계로 확대된 것은 188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의 회칙에 의해 이루어졌고, 
    198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회칙 “슬라브인의 사도들”(Slavorum Apostoli)을 통해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와 함께 이들을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
    
    치릴로는 데살로니카에서 태어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형 메토디오와 함께 모리비아에 가서 신앙을 전파했다.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이 창안한 치릴로식 알파벳을 
    사용하여 전례서들을 슬라브어로 번역했다. 로마에 부름을 받아 갔으며 그 곳에서 869년 2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메토디오는 주교가 되어 헝가리의 판노니아에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반대파들의 질투심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언제나 로마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체코스로바키아의 벨레라드에서 885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슬라비어로 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서
    (Cap. 18: Denkschriften der kaiserl. Akademie der Wissenschaften, 19, wien 1970, p. 246)
    
    당신 교회를 길러 주시고 모든 이를 일치 안에 모아 주소서
    
    콘스탄티누스 치릴로는 많은 격무로 인해 몸이 지쳐 병이 들고 말았다. 여러 날 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 
    하느님의 환시를 보고 다음 말로써 찬미의 노래를 시작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
    
    거룩한 옷을 입고 나서 온종일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황제의 종도 이 지상의 어떤 인간의 
    종도 아닌 전능하신 하느님의 종일 뿐이다. 과거에 나는 죽어 있었지만 지금 살아나 영원히 존재하리라. 아멘." 
    다음날 수도복을 입고는 빛에다 빛을 더하듯이 치릴로(촛불이라는 뜻)라는 수도명을 취했으며, 
    이 수도복을 입고 50일 동안 수도자로 살았다.
    
    영원한 안식을 얻을 시간이 다가와 이 세상을 떠나 하늘 본향으로 옮겨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손을 쳐들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하느님이신 주여, 당신께서는 모든 계급의 천사들과 영의 권세들을 지으셨습니다. 
    당신은 하늘을 펼치시어 땅을 견고히 하시고 만물을 무에서 존재에로 이끄셨습니다. 
    주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행하시며 당신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키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제 기도를 들어 주시어 당신께서 이 무능하고 무가치한 종인 저에게 맡기신 
    당신의 충실한 양 떼를 안전히 지켜 주소서.
    
    당신을 모독하는 이들의 불신앙과 사악에서 그들을 지켜주시고 
    당신의 교회를 길러 주시며 모든 이를 일치안에 모아 주소서. 
    당신 백성이 주님의 참된 신앙 안에서 일치하며 그 신앙을 고백하게 해주시고, 
    그들 마음에 당신 교훈의 말씀을 불어넣어 주소서. 
    형제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고 당신 마음에 드는 일을 행하도록 격려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로서 우리를 받아들여 주신 것은 오로지 당신의 은총입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이제 당신 것으로 되돌려 드립니다. 
    주님의 힘센 오른팔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들게 하시어, 
    그들 모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당신 이름을 찬미하고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아멘."
    
    모든 사람에게 거룩한 입맞춤을 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원수의 이빨에 먹이로 넘겨주지 않으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당신은 원수들의 덫을 끊으시고 그 멸망의 수중에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42세를 일기로 주님 안에서 잠들었다.
    
    교황은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인들과 로마 시민들이 모여 촛불을 들고 그 거룩한 분의 장례를 
    마치 교황 자신의 장례처럼 거행하고 노래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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