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받는 그리스도
ㆍ작성자: ㆍ작성일:2015-05-04 (월) 19:15 ㆍ조회:247 ㆍ추천:0

조롱받는 그리스도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그리스도의 조롱
1440-42, 프레스코. 181x151cm
이탈리아 플로렌스 산 마르코 수도원



마네 Edouard Manet- 조롱받는 그리스도(1865년) 

마네 Edouard Manet(1832~1883)파리 출생.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린다. 법관의 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 지망을 허락하지 않아서 17세 때 남아메리카 
항로의 선원견습생이 되었다.남아메리카를 항해한 1850년 겨우 쿠튀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화가인 스승에게 반발하여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미술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나 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림 읽어주는 신부님- 마네도 종교화를 그렸을까? 그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사치스런 부자였고, 한량이었다. 도덕과 윤리의 틀을 무시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정말 종교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의 그림 중에 종교화 두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그림이 모두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항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또 그는 고통은 “인류의 근본이자 시정(詩情)” 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도 덧붙였다. 그는 예수님의 수난에서 고통은 완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 조롱하기>를 그렸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가 이 그림을 그린 것 자체가 조롱 아닌가? 적어도 종교화는 신앙을 전제로 그려야 하고 신앙을 목적으로 그려야 하는데, 신앙 없이 예수님을 그린 것 자체가 예수님에 대한 조롱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신비함이 없다. 거룩해 보이지도 않고, 하느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림의 그분은 단지 힘없이 붙들려 조롱당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길가다 재수 없이 붙들린 노동자 모델일 뿐이다. 그는 여기저기 무릎에 혹이 났고, 흉측한 발을 가졌으며, 야윈 몸통의 가난하고 초라한 남자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사악하지도 추악하지도 않는 군인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계신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 그런데 두건을 쓴 군인이 우리를 강렬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왕이라 놀리는 사람은 예수님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요, 예수님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람 또한 고통 없이 평화롭게만 살려는 우리라고 시사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는 왕이라 조롱하기 위해 왕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은 망토를 입히고 있나 보다. 가끔은 무신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마네의 그림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부끄럽게 이끌어 주고 있다. 예수님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주는 것이 종교화라면 나는 이 그림을 종교화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껍데기만 신앙인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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