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보니까    

오늘 아침 무심히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가을을 만났다.
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퇴색한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덩그마니
내 차 지붕 위에 얹혀져 있었다. 새삼 정신을 차려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마다 조금씩
소멸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 문득 휑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나무와 풀은 이 세상에서의 한 번 삶과 치열했던 만큼 미련도 남고
아쉬움도 많으련만 이제 생명과의 이별을 저마다 다소곳한
순명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열매를 맺고, 
마침 내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제 TV에서 우리나라의 빈부 차이를 보여주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빈민촌에 살며 병들어 직업도 못 얻고 혼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단돈 100만 원이 없어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사람,
그런가 하면 골프 연습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
한 채에 20억을 호가해도 매물이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부자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습성을 취재하면서 명(품) 핸드백에
거의 중독 증세를 보이는 어느 젊은 여자와 인터뷰를 했다.
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이 색깔별, 모양별로 가득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발행하는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해가면서
새로 나온 디자인을 구입한다고 했다.
최소 50만 원짜리부터 500만 원까지 하는 핸드백도 있다고 했다.

왜 굳이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대답했다.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요. 저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말에 적이 놀랐다. 단지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니. 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니
누구나 다 쳐다보는지라 남의 시선이 무척 싫은데,
그 여자는 그 시선 때문에 그 많은 노력을 불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 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단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그 내용물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해봤자 누군가에게
별꼴 다 본다고 욕이나 먹겠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보니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겉모습, 어떻게 생기고 어떤 옷을
입은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단지 마음이 중요 할 뿐이라고
말할 때 나는 코웃음 쳤다. 자기들이 돈 없고 못 생기고
능력 없으니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 그렇다. 
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
내가 남의 말을 듣고 월급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망했지만,
내가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겨져 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 그를 잊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상의 인구 62억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아주 보잘것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 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 샘터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