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당신은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아 비행기 머리 앞부분의 문을 통해
왼쪽 통로를 지나오면서 ‘31E’ 자리를 찾아 나갔다.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시 내 티켓을 보고 20후반 번호부터
30초반 번호까지 천천히 확인해 보았지만 분명 내 자리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30대 후반쯤 된 듯한 백인 부부와 그 사이
‘31E’ 좌석에는 3~4살쯤 된 것 같은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짧은 사이 난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할까?….
내 자리라고 말하고 자리를 찾아야 할까?, 아니면…,
그러다가 정신없이 떠들며 장난을 치던 그 어린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동그란 눈망울과 큰 까만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마주치던 그 순간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어 보였다.
난 통로 한 쪽에 기대서서 스튜어디스를 기다렸다.
마침 지나가던 남자 승무원과 마주쳤다.
어깨 계급장을 보니 다른 승무원보다 지위가 좀 높은 것 같았다.
난 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내 자리가 ‘31E’인데 꼬마가 앉아 있거든요. 가족인가 보죠?
떼어놓고 싶지 않으니 자리가 된다면
어디라도 좋으니 다른 자리를 마련해 주시면 어떨지?…”
분위기를 한번 둘러본 그 승무원은 ‘그러겠노라’ 대답하고
비행기 뒷부분 근처에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캐비닛에 짐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안정을 찾을 즈음
한 무더기의 그룹이 출발 직전 위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더니
앞으로부터 자리를 하나하나 채워나갔다. 그리고 남은 몇 명이
내 자리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지체없이 말했다.
“여기 내 자리인 것 같은데…,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잠깐만!”
난 아까 그 남자 승무원을 다시 불렀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한 그는 사정을 다시 정확히 알아보겠노라고 하며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나타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괜찮으시다면 위의 비즈니스(Business) 석으로 옮기시죠.”
승무원의 말을 처음부터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까닭에
그저 또 자리를 옮기라는 말만 귀에 들려왔다.
‘오늘 일진이 왜 이리 꼬이지…’ 하고 생각하며
‘애시 당초 처음 내 자리에 앉을걸…’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더라면 이런 번거로움이 없이 별탈도 없었을걸….
일말의 후회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어쩌겠는가, 옮기라면 또 옮길 수밖에…,
아니 그런데 그는 나를 이끌고 앞으로 나가더니 커튼을 헤치고
맨 앞 비즈니스석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아까 그가 한 말을 다시 더듬어 떠올려보았다.
‘아! 그때, 비즈니스석으로 가자고 말했던 거였구나!’
비즈니스석에 도착해 그가 지정해준 자리에 앉아 우선 벨트를 맨 다음
주위를 둘러보니 제일 먼저 의자의 갯수가 눈에 들어왔다.
자리는 10개 남짓, 많아야 15개정도로 의자와 의자 사이의 간격은
매우 널찍널찍했고 좌석도 매우 컸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차림새가 이코노믹석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확연한 차이가 눈에 금방 눈에 들어왔다. 입은 옷은 명품들임이 분명했고,
목걸이와 보석으로 치장한 장식품 등도 확 눈에 띄었다.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니 보이지 않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우선 눈을 감고 휴식이나 좀 취해 볼까나…, 이런 젠장!
의자를 뒤로 넘길 수가 없었다. 무슨 조정버튼이 그렇게 많은지…,
좌석에 있어 다리, 머리, 어깨, 등 등… 부분 부분으로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버튼(botton)이 10개는 넘는 것 같았다.
‘뭐 생전 이런 비즈니스 좌석을 타봤어야 말이지…,
좌석 하나 맘대로 움직이기 힘들구만!’ 한참 궁리한 끝에
가까스로 좌석을 지면과 평행으로 만들고 나니 거의 침대나 다름없었다.
자리에 누우며 한마디 투덜거렸다. ‘그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그런 중에 간식이 나왔다.
다시 좌석을 정상으로 되돌리는데도 한참 또 버둥거렸다.
음식을 들고 서있는 스튜어디스 앞에서 무안하기까지 했다.
속으로 또 생각했다. ‘거 좀 쉽게 만들 수 없었나?
그냥 이코노믹석으로 가버릴까? 이거 원 불편해서…’
비즈니스석을 타 본적이 없어 매사에 당황했고 어색했다.
비즈니스석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금테를 두른 접시에 담겨 있었고
일회용이 아닌 정식의 나이프와 포크,
곱게 접혀있는 냅킨도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그냥 손으로 집어 먹으면 되지 무슨 나이프와 포크?…
여태까지 이코노믹석에서는 이렇게 단아하고 품위있게
음식을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식은 여러 가지 해물을 갈아 이겨서 만든 튀김 종류였는데
입에서 살살 녹았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하나 더 먹을 수 없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하나를 더 갖다 주었다.
그러면서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체없이 말하라고 하였다.
스튜어디스의 그런 친절함은 당황하고 어색했던 마음을 많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기분도 한층 가벼워졌다. 이젠 정말 눈 좀 붙여야겠다 싶었다.
마침 그때 나를 이리로 안내했던 승무원이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 첫마디가
“뭐 불편한 것이 없으신지요?” 였다.
난 없다고 대답했고 언뜻 취침을 위해 우선 담요 한 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서둘러 담요를 가져오면서
“여기 담요는 이코노믹석과는 달리 좀 두껍고 커요” 라고 말하며
그도 이제 좀 여유가 생겼는지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난 성의껏 대답했고 말이 나온 김에 비즈니스 좌석은 생소하여 불편하고
또 경험이 없어 익숙치 못한 까닭에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던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첨가하였다.
“난 비즈니스 좌석엔 잘 안 맞나봐요. 내 수준은 이코노믹석이 딱 맞아요!”
그러자 그는 고개를 강하게 흔들면서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아니,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비즈니스를 탈 자격이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힘주어 말하며 몇 가지의 예를 직접 덧붙였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여기에 탈 자격이 있습니다!
조금 전 아기한테 기쁘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물론,
맨 끝자리로 쫓겨 갔어도 당신은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지요.
솔직히 기꺼운 마음으로 임하는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만나 참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불편함이 혹시 있으면 저를 꼭 불러주세요!”
그가 한 말 중에 가장 또렷하고 정확하게 마음에 와 닿은 말귀는
“당신은 충분히 비즈니스를 탈 자격이 있습니다!”였다.
그 말은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내 생활을 돌아보게도 만들었다. 또 어떤 의미에선
내게 자신감을 심어 주는 말 같기도 했고 동시에 앞으로의
삶의 자세를 일깨워 주고자 하는 책임감을 심어주는 말 같기도 하였다.
일 년 채 남짓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승무원의 말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본다.
과연 ‘나는 충분히 ○○를 탈(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돌아보건대 정말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한 순간의 단면을 보고 내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었을까?….
사실 난 앞으로도 그렇게 살 자신이 솔직히 없는데…,
늘 나를 먼저 생각하고 또 나를 위하는 마음이 커 거기에 합당한 자 되지 못했는데…,
아마 그 승무원의 말은 앞으로 그런 삶을 살라는 격려 내지는
당부의 말이 아니었을까? 정말 나는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그러면서도 그 승무원의 말은 내 마음 속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 들어와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눈을 조용히 감고 있자니 그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려진다.
“당신은 충분히 비즈니스를 탈 자격이 있습니다!”
글 : 홍승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철학은 빵을 굽지 않는다」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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