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인생은 무한히 먼 미래이지만  노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짧은 과거이다.  
나이가 들면 시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진다.  아이들은 눈이 빠지게 다음 성탄절을 기다린다.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간다. 다음 생일만 해도 아주 멀게만 느낀다. 
그러니 고등학교 졸업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먼 미래의 일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은 이와 다르다. 
어른들은 "또 한 해가 가는구나.  어느새 1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이와 노인이 느끼는 시간이 왜 그렇게 다른지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추측은 할 수 있다.  
아이들의 시간은 아직 앞에 놓여 있고,  아이들은 그  삶을 살고 싶어  안달이다. 
그리고 모든 관심이 미래를 향해 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온전히 순간 속에 산다.  
그러다 시간을 느끼고 의식하게 됨과 동시에 미래지향적으로 바뀐다.  
다음 방학을 기다리고  다음 파티를 기다린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은 일종의 삶의 고양을 의미한다.  
물론 이 기대는 생일이나  성탄절을 즐거웠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 즐거웠던 기억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노인들은 긴 과거를 가지고 있고 경험도 많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상념에 잠겨 사는 노인들도 많다.  
특히 배우자와 사별하거나 현실의 삶에서 낙을 찾지 못하면  기억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과거를 회상하노라면 시간이 빨리 가기 때문이다. 노인은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다.  
현재의 일상을 제대로 사는 것도 버거운데 더 쇠약해질  미래가 기다려지겠는가.  
노인들은  삶을 가꾸는 일이 더 쉬웠던 과거의 시절을 떠올려 현재를 살아낼 힘을 얻는다.  
과거 속에 사는 사람에게  현재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면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므로 차라리 과거에 머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거는 그들이 살아갈 힘을 얻는 삶의 원천이다.
  
한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노인들도 있다. 
이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 일어나기를  바라기만 하는 부류다. 
누군가 와서  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삶에  활기를 주고 허무한 일상을 채워주기 바란다.  
이처럼 노인이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은 그 사람이 삶을 사는 방식과 직결된다.  
다른 사람이 찾아와 말을 걸어주어야만 활기를 느끼는  소극적인 사람에게는 당연히 시간이 천천히 간다. 
비어있는 식은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재를 온전히 살면서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회상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빨리 간다.  
그들은 벌써 한 해가 가버렸고  자신의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졌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 "이렇게 늙어버렸구나" 하며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새삼스러워한다.  
그러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내가 늙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하고 중얼거린다.

그 밖에는 완전히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부류가 있다.  
이들의 관심은 오늘 하루를 최대한 잘 보내는 데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일을 하기 때문에 생활에 특정한 리듬이 존재한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절대 지루하지는 않다.  
이런 삶은 편안하고 즐겁다.  이들에게도 삶은 빠르게 흘러간다. 어서 현재를 뛰어넘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들의 시간은 늦게 가지만  삶을 즐기는노인들의 시간은 빨리 간다.
   
아이나 노인이 시간과 맺는 관계는 직장생활을 하는 성인과 다르다.  
삶의 단계에 따라 시간에 대한 관계 또한 달라진다.
  
직장인의 시간은 아침부터 밤까지 꽉 짜여 있다. 
업무시간이 정해진 직업인 경우에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해야 한다.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사람의 경우 일이 시간을 규정한다.  이런 사람에게 시간의 경험은 
일의 리듬과 그의 내면의 리듬이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정해진 리듬에  아무리 잘 적응한다고 해도 외부의 조건이 그의 시간을 규정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주중에는 어서 주말이 와서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마음껏 쉴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의 시간감각은 일하는 날과 쉬는 날로 특징지어진다.
   
아이와 노인에게는 이런 외부로부터 오는 시간규정이 없다. 
물론 아이들의 생활에도 리듬이 있기는 하다. 갓난아기일 때는 어머니가 늘 같은 시간에 
젖을 먹이고 재운다. 어머니는 아기 내면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고 아기에게 좋다고 
생각되는 생활리듬에  아기를 길들인다.  아기가 자라면 유치원과 학교의 리듬에 맞춰 생활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외부가 규정하는 시간에 자기를 맞추려 들지 않는다.  
그저 명절, 파티, 이벤트 같은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를기다릴 뿐이다.
   
한편 노인들에게는 외부에서 요구하는 의무가 적다. 아침에 늦잠을 자도 되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려도 된다. 그러나 평생 해온 일을 갑자기 그만두는 것도 쉽지는 않다. 
아침이면 언제나 같은 시각에 일어나고 나름대로  알차게 하루를 계획한다.  
생활에 리듬이 없으면 삶이 텅 빈 듯한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자기만의 생활리듬을 찾은 사람은  매일매일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보람을 느낀다.  매일 같은 길을 산책하고 시간을 정해놓고 
취미활동에 집중하기도 한다. 언제까지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시간의  압력이 
없기 때문에 완전히 내면의 리듬에 따라 생활할 수 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는 이렇게 생활리듬을 타며 삶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병이 찾아오고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어지면  시간을 느끼는 것도 달라진다.  
어서 고통의 시간이 끝나기만을 바란다. 물론  병이 들어서도  삶과 시간에  연연하는 사람도 있다.  
교황 요한 23세가 로마의  노동자 거주 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다.  
한번은 '지금 하직해야 하는 이 세상은 눈물과 통곡의 골짜기'라는 말로 한 죽어가는 
노파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노파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고 한다. 
 "오, 신부님.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울리는 통곡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그녀는 병의 고통 속에서도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고통스럽더라도  삶의 시간 속에 더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 인생의 어느 단계를 사느냐에 따라  시간의 경험도 달라진다. 
그러나 시간의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삶의 단계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사느냐이다.
삶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에게 시간은 부담스러운 짐일 뿐이다.  
그는  이 불편한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바란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시간 속에 살며  순간을 즐길 줄 안다.  
그에게 시간은 게 눈감추듯  빠르게 지나간다.  
삶을 만끽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루하게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유한성 또한 잘 알고 있다.  
시간이  유한함을 알기 때문에  더욱 시간을 만끽할 수 있고  
감사하는 마음과 성찰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대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이때 시간은 시간속에서 하는  경험과 혼동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순간에 대한 감각이 발달하고 현재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더 잘 감지할 수 있게 된다.  순간 속에 사는 사람은  삶의 활기를 얻기 위해 
따로 외부의 자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자기 자신을 느끼고 있으며 주변을 
느낄 줄 알기 때문이다. 순간을 만끽하고 싶으면  숲으로 산책을 가면 된다.  
혹은 친구와의 깊은  대화 속에 빠져 시간을 잊는 방법도 있다. 
아니면  침묵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도 좋다.  명상의 고요 속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이렇게  시간의 한가운데 앉아 시간 안으로 파고 들어오는 영원의 존재를 느끼는 것도 좋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시간의 유한함을 느낀다.  
이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남은 시간을  최대한  많은 일거리로 채우려 드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한시라도 일 없이 가만히 있으면 뭔가  놓치는 기분이 들어 불안해한다.  
아까운 시간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오는 불안이다. 
그러나 뭔가 경험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할수록 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좁아진다.  
그러면 순간 속에 살 수 없고 경험을 해도 온전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므로 순간에 '올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지,  
지금 내 앞의 사람에게  어떤 삶의  지혜를 들려줄지 고민한다.  
이런 사람은 지혜롭다고 말할 만하다. 주어진 시간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시간을 즐길 줄 안다. 그리고 순간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온전히 현재를 살고 마치 세상의 시간을  다 가진 듯 태연하며 
시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고 여유롭다.  
그리고 시간을 본연의 것 그대로,  즉 신의 선물로 받아들인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