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도 신뢰를 배울 수 있다  

  

어린 시절에 자신감을 배우지 못해 어른이 된 뒤에도 다른 사람을 잘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유년기에 결핍되었던 자신감은 물론 노년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새로운 것이 다가오면 두려움으 느끼고 사람을 대할 때 의심이 많은 편인가?  

하지만 유년기에 만들어진  성정이  평생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감은 노년기에도 배울 수 있다.  이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으니 

사람들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할 일도 없다. 

노년은 마음의 자유를 얻고 세상일에 담담해지는 때다. 

자유와 담담함 속에서는 자신감도 쉽게 생긴다."

   

내가 아는  노인들 중에는  어렸을 때  수줍음을 타던 사람이 많다. 

이들이 늙어서 갑자기  코미디언이 되지는 않았지만  담담하게 마음의 균형을 지키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는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이 아니다.

   

1981년의 일이다.  우리 뮌스터슈바르차호의  수도원장  보니파츠씨가 

내게 매달 한 번 청소년 미사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수도원장 모임에서 청소년 미사의 좋은 효과에 대해 듣고 새로운 사업으로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일을 맡았고,  그에게 직접 와서 청소년들을 위해  설교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거절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뒤 백 회 기념  미사에 다시 그를 초청했다.

그는 그사이  수도원장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내 초청에 응한 그는 청소년 신자들 앞에서 아주 감동적인 설교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여러 번 초대를 받았지만 너무  수줍어서 매번 거절했다고 말했다. 

항상 관심을 쏟던 사업이었는데 열흔여덟 살이 되어서야 그 자리에 나올 용기가 났다고 했다.  

노인 된 그는 수줍음을 포함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 담담하게 할 수 있었다.  

그 말에 청소년들은 감동과 용기를 얻었다.  

어릴 때 생긴 자신감의 결핍과 자기 안의 자신감 없는 아이와 화해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난다. 

잘하고 못하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준다면 좋을 것이다. 다가오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자신 안에 머물면 된다.

   

이런 태도를 위해서는 물론 어느 정도의 성숙함이 필요하다. 

모든 노인들이 다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인들 중에는 항상 대접받아야 하고 관심의 대상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한다고 여기고 누군가에게  칭찬을 들어야만 

자존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미성숙한  태도다. 

노년의 목표는 자신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주 안에 머문다는 뜻이고  주 안에 삶의 초석을 놓으며  

자신의 가치의 근원을 주에게서 찾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결국  자신의 능력이나 다른 사람보다 주를 믿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주를 믿으면 사람에 대한 신뢰도 저절로 생긴다.  

의존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기 내면의 독립과  타인에 대한 

신뢰가 병존할 수 있는 것은  내 믿음이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성향이  노년기에 이르면  더 잘 드러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어릴 적에 부족했던  자신감이  늙어서는 더 약해지기도 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미래를 바라본다.  

그리고  친지, 이웃, 친구, 의사, 간호사 할 것 없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표현한다. 

수도회의 한 나이 많은  형제는 늙어가면서 자꾸만  까탈스러워진다면서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늙어가면서 자꾸만 뒤를 지켜주는  든든한 

아버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상실감이 되어 그를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노년에 이  상실의 과거를 돌이킬 방도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  상실의 아픔을 다시 한 번 느낀다면 그  오래된 상처에도 천천히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갑자기 까탈스러운 노인네가 넉넉한 할아버지로 돌변 하지는 않겠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자체가  변화의 여지를 만든다. 

타인을 대할 때 의식적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그 상처도 

힐데가르트 빙엔이 인간 되기를 목표로 표현한  진주알로 변화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런 사람이었다고 해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 살라는 법은 없다. 

계속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더욱 담담해지고 자신, 타인,  신에 대한 신뢰를 쌓아갈 수 있다.  

신뢰를 배우는 일은  결국 영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나를 조건 없이  받아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주님 안에  믿음의 성을  쌓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으면  인간에 대한  믿음도 함께 생겨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주의  자녀이며,  모든 사람의  내면에  예수가 들어 있고,  선한  인간의 

씨앗이 잠자고 있으며,  적어도 선한 인간이고 싶은 갈망이 들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정상이다.  두려움 또한 초대다.  

두려움을 마주 보고 두려움이 우리에게 내미는 질문을 받자.

   

늙어가는 일을 생각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두려움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누가 늙은 나를 보살필 것인가?  신체적, 정신적 퇴행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가?  

궁상맞은  노년을 보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배우자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연  나는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는 처지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내게 도움을 줄 것인가? 

돈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양로원에 가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괜찮다.  두려움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이렇게 물어보자.  

이 두려움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궁핍한 노년에 대한 두려움은  미리 재정적  

노후보장을 하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인 실천과 노후보장이 두려움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걱정 없는 노후를 위해 모든 가능한 준비를  다해놓고도  

무슨 돌발 상황이  일어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사고방식이 중요해진다.  

두려움을 마주 보고 노후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상해보자. 

돌발 상황에 대해서는 보험과 같은 조직적 대처방안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밖의 다른 두려움은  주님이 늙은 나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손에 

모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미리 준비해둘 수 있는  구체적 실천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노후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찾는다. 자녀들에게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양로원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양로원을 직접 방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노후를 편히 보낼 수 있는 좋은 기관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그 일을 맡아주기를 바란다면 현실적인 관점에서 상의해보자. 

그리고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이가  아주 많이 들어서도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궁핍한 노년을 보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  

노후대비  저축과  재산관리에 대해 은행과 상의한다. 

그리고 모든 재정적 수단이 바닥나도 정부의 후원을 받을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만일의 경우에도  사회보장의 그물망 밖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직접 대면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을 피해갈 방법은 없다.  이 두려움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문제와 맞닥뜨리는 

계기가 된다. 오직 남편이 아내의 사는 이유인가?  당신 또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다.  단지 그의 아내, 그녀의 남편인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은 물론 슬픔이며 아픔이다.  

그러나 배우자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스스로를 돌보고 자신의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줄 것이다.  둘이 함께했던 삶에 감사하라. 

그리고 둘 사이에 자라난 것은 아무리 죽음이라고 해도 파괴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라.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