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시간은 다이어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다이어리 없이는 못 살았습니다.  

일정이  너무 많아서 정확히 기록해두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제 다이어리 없이 살아보니 이것도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음의 질문을 한다.  

노년을 허송 세월로 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시간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다이어리는 시간을 잘 사용하기 위한 도구였다. 

하루하루 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과제를 주어진 시간 내에 

잘  수행하기 위해 시간을 조직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세세히 시간을 쪼개고 나누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지금은 최대한 많은 일을 해야 할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을 계획하는 것도 좋다. 

생활에 리듬을 줄 수 있는 시간표를 만들어보라. 

리듬의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면 삶도 한층 활기를 띨 것이다.

만일 하루가 잔소리와 짜증, 말다툼으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엄청난 시간낭비다.  

성과에 얽매이지 마라.  의식적으로 시간을 느끼려고 노력하라.  

온전히 순간을 느끼기, 대화 속에 빠져들기,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기, 

타인을 위한  시간을 남겨두기는  노년에 습득해야 할  새로운 기술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즐기는 시간도 충만한 시간이다.  

진정으로 순간순간을 느끼며  산다면 그 시간은 충만한 시간이다.

 
   

노년에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이 없어진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살면 된다.  온전히 순간 속에 있고 의식적으로 

순간을 산다면 그 시간은 충만한 시간이다.  

쓸대없이  허비하는 시간도 아니고 안 쓰고 버려지는 시간도 아니고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압축해야 하는 시간도 아니다.  

선물로 주어진 시간이며  편안한 시간이며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은혜로운 시간이다.

 
   

노인들은 과거 속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해야  순간을 온전히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미래를 대하는 방법은?

 
   

노인들은 지나간 일을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그중에는 젊은 세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모두 귀 기울여 듣는데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하도 많이 들어서 지겹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아주 다를 수 있다. 

나와 나의 훌륭한 점만 이야기할 수도 있고, 내 경험을 반주하며 

그 의미를 현재의 삶과 연관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누군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기든 그의  지식을 활용하라.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하라.  

손자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옛날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자신들의 과거 경험과 가치를 손자에게 전달한다. 

그러나 과거 속에 매몰되어  현재를 등한시하는 사람의 옛날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도 불편하게 한다. 이런 노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현재, 지금 살고 있는 순간에도 그만큼 충실해야 한다. 

그리고 깨어 있는 정신으로 순간순간을 살아야 한다.

 

물론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예언자로서  미래를 보는 특별한 눈을 가진 노인들은 항상 있어 왔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나오는  시메온과  한나가  그런 노인들이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이 노인들은 자기 혼자만의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내다봐야 하는 특별한 책임을 가진다.  

시메온과 한나는 아기 예수의 정체가 무엇이고 이  아기가 앞으로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지 꿰뚫어본다.  이렇게  노인들은 가끔씩 이 사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통찰하는 특별한 감각을 보여준다. 

미래를 통찰하는 노인들의 이 감각을 그냥 썩힌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소통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  

할머니가  미래에 대한 별다른  깊은 생각 없이도  손자에게 잘될 것이라고 

용기를 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회사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고  경제역학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한 걸음 물러난 위치에서 보는  사람의 현명한 조언을  

꼭 자기가 다니던 회사가 아니더라도  필요한 곳에 해줄 수도 있다.  

혹은 노인 특유의 감각으로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의 말은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해 노인들이 지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이것은  행동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깊이 있는 시선에 의거한 것이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