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과거를 대하는 방법   

 

최근 한 부인이 자기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전쟁 직후  트라우마를 경험했는데  그때 일은  말하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제기된다.  

이와 같은 행동은 억압인가,  아니면 과거를 묻어도 되는가?  

내가 잘못한 일과 했어야 했는데 못한 일들만 자꾸 떠오르는데 그 과거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놓쳐버린 기회와 판단착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가?  이것은 지혜로 가는 길인가, 아니면 자기비난일 뿐인가?

  
  

전쟁 때  가까운 사람이 강간,  살해당하는 것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를 다 끄집어내어 대면하라고 말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트라우마의 기억은 영혼의 한 구석에 조심스레 봉인해놓는 편이 더 좋은 치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이 경험이 신경증이나 두려움, 병으로 나타난다면  

그때는  상담이나 테라피의 도움을 받아 그것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원천을 향하는 일이다.  

누구나 건강한 삶을 살게 해주는  정신적 원천을 가지고 있다.  

그 부인의 동생 같은 경우 트라우마의  경험을 한 그 당시 삶의 힘을 

어디서 얻고 있었는지  기억해내고  그 원천에 가 닿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그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라는 말은 수백 번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 기회를 다시 되돌릴 수도 없고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자기비난은 삶을 후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기비난을 일삼는 사람은 그것을 핑계 삼아 현재의 삶이 요구하는 것도,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는 노년의 요구도 방관한다. 삶이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그 과거와 화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과거가 언제나  성공적이지 않았고, 잘못된 것도 많았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살아냈고 그 경험으로부터 내가 인생을 배웠다는 사실이다. 

그 경험을  통해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라. 

놓쳐버린 기회가 자꾸만 떠오르거든 그 미련과 마주하라,  그리고 충분히 아쉬워하라,  

그리고 다시 지금 이 순간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오라.  나는 오늘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의 과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과거와 화해할 수 있다면, 

과거를 자신의 장단점을 알아가는 탐구의 장으로 볼 수 있다면 

나는 과거를 통해 더욱 담담하고 현명해질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은 현명하다.  발터 벤야민은 

"행복은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고 말했다.  

만일 경악하지 않고 모든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과 화평한 관계에 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남은 수명이 짧아지면서  내가 가진 가능성의 수도 작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자유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이 허락되고, 모든 가능성의 문이 열려 있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자세의 문제라고 하는 편이 옳다. 

다른 사람의 요구와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 나 스스로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는 자세,  

나의 양심을 따르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마음자세를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다. 

내가 아무리 외적으로  힘이 없다고 해도 내 생각의 자유를 뺏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만약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낸다면 이 자유는  표현을 얻을 것이다.  

노인들은 잃을 것이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도 없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면 된다.  

이것이 노년과 함께 자라나는 진짜 자유다.

 
   

외적 자유는 나이가 들면서 감소한다. 

즉 내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이것은 싫어도 인정해야 할 일이다.  

일련의 애도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긍정할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애도를 통해 내 영혼의 내면의 공간에 이르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더 이상 타인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