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처럼 살기 

 

노년은 죽음을 연상시킨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  그 속에  지혜가 있다.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림이든 언젠가는  죽는다.  

오늘이나 내일  갑자기 죽음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삶이  마비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 살고 있는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들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다.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는 백 세 넘게 장수한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출판사에

볼 일이 있어 프라이부르크에 나올 때마다  유년기를 보냈던 장소에 들렀다고 한다.  

그래서 사우인스란트에 있는 산장을 찾았는데 한번은  산장 여주인과 여담을 주고받게 되었다.  

라너의 친척들은 프라이부르크의 귄터스탈에서  산장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알고 있었다. 

여주인은 이미  팔십이 훨씬 넘은  노파로 라너보다 나이가 많았다.  

둘 사이의 대화는  산장을 보수해야 한다,  손댈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스키 리프트를 설치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어느 순간 죽음으로 바뀌었다.  

아직도 산장경영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던 노파는  죽을 준비는 이미 다 해놨고

신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응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매일매일 이렇게 기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랑하는 주님!  부르시면 당장 응하겠습니다.  오늘만 빼고요."  라너는  

지방색이 짙고  토속신앙적인 소망이 담긴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웃었다.  

그 여주인에게  죽음에 대한  생각과  산장 경영의 일상은  유쾌하게  병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내면의 자유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융은 종교는  "죽음의  준비를 위한  복잡한 제도"라고 말한다.  

"죽음을 그저  삶이 끝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삶의 원래  목표이자 의미 충족으로 본다면"  

종교에서의 죽음은 지혜에 대한 영혼의 관계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융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이 인간 정신의 욕구와 맞아떨어진다고 말한다.

"늙어가는 인간은  싫든 좋든  죽음을 준비한다.  

자연의 것들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는 것과 같다.---죽음을  목표로  설정하지 않는 것 

또한 신경증적 범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어린아이가 미래에 관한 환상을 억압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내게  허락된 시간에 감사하고 신이 선물로 주시는  

새날에 매일같이 기뻐하며 나도 남에게 선물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삶이 유한하다는 깨달음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마음을 두드려 깨운다.  

바로 지금,  여기서 사는 것처럼 살아보라고.

 

독설가들은 말한다.  누구나 오래 살고 싶어 하지만  죽고 싶어 하

는 사람은 없다고,  그러나 죽고 '싶어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든 죽기 싫어하는 사람이든  결국에는 누구나 다 죽는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도 누구나 갖고 있다.  이 애착은 건강한 정신의 표시다.  

삶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삶을 사는 동안에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고  

허락된 시간을  즐겨야 한다.  바로 죽고 싶어 할 이유는 없다.  

죽음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고, 삶이 유한함을 자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그러면 죽을 준비도 하면서 동시에 열심히 살 수 있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노인들 중에는  진짜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는사람들도 있다.  

삶이 힘들어져서 더 이상  삶이 즐겁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날,  이제부터는  남의 도움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더욱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삶이 즐거우면  죽고 싶어 할 이유가 없다.  

심각하게 죽고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에도 여지를 둘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죽음에 대한 소망은 더욱 집중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천천히,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는 계기가 된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죽음의 소망을  적극적인 방식으로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  

죽음에 대한 소망이 생기면 그 소식이 죽음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좋다.  

얼마나 더 살게 될지의 문제는 나만의 결정이 아니다. 

죽고 싶다는 소망을 인정하면 남은 삶을 집중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말을 절대로  입버릇처럼 해서는 안된다. 

이 소망이 자기중심적인 투덜이 노인네의 살기 힘들다는 불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보면 살 만큼 산 가부장들의 이야기가나온다.  

그들은 살 만큼 산 뒤 삶의 포화를 느끼고 만족하여 떠난다.

   

남의 도움에 의지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살기?  어떤종류의 삶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는  호스피스 운동의 표이다.  

호스피스 운동은  생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품위 있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일을 일컬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동행한다고 한다. 

자신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 혹은 살면서 겪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들어 줄 사람이 있어서 

생의 마지막이 외롭지 않다면 죽는 사람도 마지막숨을 거둘 때까지 정말 사는 것이다.  

그저 봐주는 사람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가는 것이 아니다.  

졸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생의 마지막 몇 주를 동행하며 보살펴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라는 사람과 내 삶의 비밀에  존경심을 표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이 존경심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살아온 

삶의 가치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느낀다.

   

그런데 죽어가는 사람이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때가 있다.  

혼자서 죽음의 비밀을 마주 보고 싶을 때다. 이 요구는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 또한 삶의 집중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융은 이런 단계에 대해서 이미  한 발은  다른 세계에 

담그고 있어서 일상적인 현실에 적응하기 힘든 때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야기를 하거나 편지를 쓰고 싶어 하는 욕구는 있다.  

죽음의 비밀에 대해 명상하기 위해 혼자 물러나지만 동시에 

그것에 관해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돌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모두들 내가  죽기만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진짜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에게 삶은 고통이다.  

아직도 살아 있어서  미안해해야 할 지경은 삶이 아니다.  

그렇게 죽어 가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을 상실한다. 

반면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끼며 죽는 사람은 

정말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산다. 

그는 죽음의 과정이 비밀에 둘러싸인 것임을 감지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사람들이 고개를 숙일 만큼 흔치 않은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낀다.  

이 모든 것이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날들에 존엄성을  부여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자신 안에 깊이 숨겨져 있던 갈망을 접하기도 하고  

외부가 요구하는 역할에 가려져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자신의 진짜 모습과 조우하기도 한다.

   

타인이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죽어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는 큰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이 동행자가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꺼운 마음으로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면  미안해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까지 제대로 의사표현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누군가가 자기 앞에 있으며 

그 사람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감는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