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의 것을 축복하다 

  

'죽음' 을 표현하는 독일어의 관용구 중 '시간 속의 것을 축복하다'라는 말이 있다. 

노인이 된 내가 시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정말 그들을 축복하며 죽는 방법이 있을까?

  

 '시간 속의 것을 축복하다.' 이 관용구는  정말 마음에 든다.  

노인이 되어  자기 자신과  일치를 이루며 사는 사람은 

시간 속에 오래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실로 축복이다.  

노인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고 돌아갈 때  '축복받고 간다'는 말을 쓴다. 

노인과의 대화가 내게 축복이 된 것이다. 

가끔은 대체 무엇이 축복이였는지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노인과 대화를 나눌 때 축복받는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축복을 의미하는 라틴어 'benedicere'는 원래 '잘 말하다, 덕담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노인들에게  좋은 말과  덕담을 들으면 축복받는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축복을 주는 노인이 되고 싶다면 먼저  말에 주의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이 좋은 말인지,  용기와 기운을 북돋는 말인지, 

상대의 선한 마음에 호소하는 말인지 생각해야 한다.



축복의 두 번째 의미는 거듭남에 있다. 

축복을 가져온다는 말은 결실을 맺고 번성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축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선물 받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축복은 보호의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람들에게 선물이라는 사실,  

자신에게서 축복이 나와 사람들에게 보호의 느낌을 선사하고  

다시 축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게서  평화와 희망, 믿음의 느낌이 풍겨날 때 나는 타인에게 축복이 된다.  

그러나 내 안에 평화가 없다면 평화의 느낌을 풍길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나의 성공적 노년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곧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늙는 일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특별한 장점도 가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 속의 것을 축복' 한다는 말은  죽음을 미화시키는 말이 아니라 성공적인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 관용구는 아마도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모인 가족과 친구들을 

축복한 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죽어가는 사람이 임종을 보기 위해 모인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고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의 말을 했다. 

그러나 이 관용구는 다른 관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남기고 가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는 해석이다.  

그는 자기 삶의 방식을  유산으로 남기고 간다.  예수는 죽음이  임박하자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 요한 16:7 - 



예수가 스스로에 대해 하는 이 말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삶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던 우리의 정신을 아직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보낸다.  

이 정신은  순수하게  우리의 정신은 아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의지한던  주님의  영이기 때문이다.  

삶을 살면서 우리 고유의  취향과 형태로 가꾸어온 이 정신을 우리는 시간 속에 사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을 통해 유한한 것, 시간 속의 사람들, 시간을 축복한다.

   

사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옳을까?  

사후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죽은 뒤에 나를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죽음과 사후에 대한 생각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속성이다. 

인간은 죽은 뒤의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고 싶어 한다.  

성경에 보면 사후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우리는 신의 만찬에 초대받으며  예수는 우리가 영원히 머물 안식처를 말련해주신다.  

그리고 주님 곁에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충족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사후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이미지를 통해서뿐이다.  

그 세계가  구체적으로  정말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시간과 공간의 사라질 세계를 그려낼 수 없기 때문에 

너무 자세하게 사후세계를 상상하려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른 한편 성경이나 정신적 전통이 전하는 이미지들을 믿는 것은 좋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삶과 사랑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준다.  

이 세상에서 갈망하지만 충족되지 않는 것들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에게 허락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죽음 속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거듭남의 메시지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 사랑에 나를 맡기면 그곳이 나의 천국이다. 

그리고 사랑에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글 때 천국의  문은 닫힌다. 

주님이 문을 닫고 우리를  들여보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크고 넓기 때문에 어느 날 우리 스스로가  

마음을 열고 이 사랑 속에 스스로를 던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이  현실의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피난처가 되어서는 물론 안 된다.  

예전에는 기독교인들은 현실의 삶을  개척하지 않고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으로 위로를 삼으려 

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생각하고 상상력을 뛰어넘는 것을  

붙잡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속성 중 하나다.  

인간의 정신은 죽음의 한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한계를 넘어도 되는 것이다.  

융의 말에 의하면  인간 영혼의 지혜는 사후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만나게 될지도 짐작하고 있다.  

즉 우리  영혼의 지혜를 믿어도 된다.  

죽음 뒤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상상하는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것을 알고 있다.

내 안에 미련과 후회가 너무 많다면 사후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족들 사이에 너무 큰 불화와 갈등이 존재하고, 자녀들이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낸다면,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면  걱정부터 든다면,  그래서 차라리 내 삶과 가족의 삶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다면,  이 무거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에 대한 생각은  내 안에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는  불화, 나의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속에 제대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을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삶은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모든 것을 다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미처 해보지 못한 일들을 다  만회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진짜 삶을 산다면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은 

삶으로 화하여 사라진다.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는 일 또한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문제는 나에게 마음을 닫는 사람들과 화해하는 일이다.  먼저 그들이 스스로와  화해해야만 

다른 사람들과도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가족이나 친척이 화해를 거부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화해의 방향으로 다스릴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편지를 써서 화해를 청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대로  잘잘못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감정을 다시 불러낼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무엇이 싸움의 원인이었는지  

분명히 밝히는 일에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에 잘잘못을 따지려 들면 

일단 상대에게 잘못을 미루며 자기를 변호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되면 화해는 영영 불가능해진다.  

그저 내가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  화해를 원하며 모든 잘못을 내가 안고 가겠노라고 

편지를 써보자. 이로써 일종의 제안을 하는 것이다. 상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지 

안 받아들이는지는 이제 상대의 몫이다. 

   

조금 다른 상황으로는  자녀들과는 잘 지내는데  자녀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서 

부모를 찾아와  서로를 욕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어느 쪽 편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예 그 싸움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죽기 전에 너희들이 화해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싶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쓰자.  

그러나 편지의 내용이  부탁 이상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끔은 어머니나 아버지의  죽음의 행보가 늦어지는 동안  자녀들이 화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절대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테니  

부모의 죽음이 자녀들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설사 임종 전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결국 축복이 되어 가족을 화해로 이끌 것이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