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관계  

 "조부모는 21세기 초반 볼 수 있는 노년의 양상 중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몇 안 되는 현상에 속한다." 
취리히의 사회학자 프랑수아 회핑어의 말이다. 

수명연장으로 인해 조부모와  손자 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이례 없이 늘어낫다. 
즉, 보부모를 가진 손자 손녀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은 없었다.  이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조부모와 손자 손녀의 관계는  성격상으로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와 다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와 갖가지  마찰을 겪는다.  
부모를  보면서 배우기도 하지만 부모로부터 경계긋기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각각의  성장과정에는 위기가 따르기 때문에  
아이들의 부모에 대한 관계는  애증과 같은  모순적 관계인 경우가 많다.  
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아이의 요구와 행동을 제한하고 
교정하고 비판하고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에게  저항으로 대응한다.  
그러나 이렇게  씨름을 하는 속에서 아이는 성장하고 성숙해간다. 
   
조부모와 손자 손녀  사이가 좋은 것은  부담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부모는 부모처럼 아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래서  조급한 비판 없이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또한 인생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모든 일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있다.  
조부모는 아이에게 안정감과 포근함을 준다.  
아이에게 조부모는 이해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주는 다정하고  편안한 존재이다.  
게다가 아이의  청을 들어주는 데 있어서도 부모보다 훨씬 너그럽다.  
좋아하는  음식도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할머니는 다 해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뒤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노인들도 많다. 
손자 손녀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은 더할 수 없이 애틋하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신을 잘 따르고,  손자 손녀를 돌보며 소일할 수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우리 형님은 손녀가  할아버지를 매우 좋아한다며 자랑이 대단한데,  
낮잠을 잘 때에도 반드시  할아버지 옆에서만 자야 한다고 한다.  
내 여동생 부부도  이삼 주 정도  미국에 놀러가면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어찌나  잘 따르는지 모른다며 좋아한다.  큰 손녀는  벌써 아홉 살인데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꼭 할머니 할아버지의 침대로 기어들어온다고 한다. 
부모가 알뜰하게 보살피는데도 왜 이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을까?  
아마도 젊은 부모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다른 종류의  안정감을  조부모의 품에서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들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감을 발산한다. 
"공부든 운동이든 까짓것 겁낼 것 하나 없다.  다 잘할 수 있으니 걱정 마라." 
아이는 학교라는 비보호 영역으로 나가기 전 할아버지 할머니가 주는  
절대적 보호의  느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젊은 부모에게는 없는 그  무엇,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만 있는 
넉넉함과 너그러움,  이해심과 연륜, 삶에 대한 믿음을 감지한다. 
이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안정과 지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조부모를 통해 자신의  뿌리에 닿는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조부모가 이제까지 살면서 쌓아온  경험과 삶의 에너지를 나누어 받는다.  
   
부모처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손자 손녀들의  고민은흔히 조부모를 향한다.  
마음속 두려움과 일상에서 받는 상처, 말하기 힘든 사안이나 동경의 느낌에 대해서도 털어놓을 수 있다.  
부모와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비난받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장독 안의  비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말할 수 있다. 

-노년의 기술 (안젤름 그륀 신부 지음, 김진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