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 기도 중에 만난 아버지
피정 기도 중에 만난 아버지  
피정 모임에서 지도 신부님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순간은 언제인가?"
묵상하고, 그때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평화로움을 느껴보라고 하셨다.
성체 앞에 꿇어앉아 묵상을 하면서 나의 생각은 어린 시절로 하염없이 날갯짓을 하였다.
기억은 분명히 인간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다.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삶을 느끼고 시공을 초월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
내가 살아오면서 행복하고 평화로웠던 순간은 늘 아버지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서 행복과 평화의 추억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그분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살아 숨쉬고 있다.
나에게 아버지는 때로는 따뜻하고 정겹게, 때로는 가슴 아픈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몹쓸 병에 걸리셔서 갑자기 세상을 뜨신 것이 벌써 이십오 년째,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내 삶 속에 살아계시고 늘 새롭게 다가오신다.
아버지는 늘 해맑은 웃음과 큰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셨던 매력이 많으신 분이었다.
그분의 모습은 늘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때로는 불같은 무서움을 지니시기도 했다.
그러나 늘 마음속에 편안함과 셈세한 사랑을 지니셨던 분이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던 분이라 장례식 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와서
아버지의 은혜를 입었다면 펑펑 눈물을 쏟아 냈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나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개념에 접근한다.
아마도 내가 일곱 살 되던 어느 여름날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누나들과 함께 할머니 댁에 가셨고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만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체했는지 오후부터 열이 오르고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하루 종일 방바닥에 엎드려 굶으면서 끙끙 앓았다.
저녁때가 되자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시장으로 나가셨다.
그러고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손으로 집게 하셨다.
나는 과자, 과일, 깡통 등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지만 입에도 대지 못하고 다시 잠이 밀려왔다.
한참 후에 잠에서 깨어보니 내 머리맡에서 동생이 그것 모두를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이 뿌옇게 보였지만 나는 너무 아파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의 등에 업혀 있는 모습, 아버지의 등에서 느꼈던 따뜻한 체온은
내 인생의 어떤 평화보다도 더 감미롭고 포근한 기억이다.
나는 묵상 내내 가슴으로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체온을 느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이 내 마음속에는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양평읍 근처에서 공장을 운영하셨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방학이면 으레 부모님이 계신 양평에 내려가 지냈다.
그 해 여름방학에도 그곳에서 지냈는데 아버지는 동생과 나를 닷새마다 장이 서는
양평읍으로 데려가곤 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우리에게 항상 똑같이 해주신 일이 하나 있었다.
장이 서면 동생과 나를 오리쯤 떨어진 양평읍까지 자전거를 뒤에 태우고 가서는
장 구경을 시켜주시고 항상 중국 음식점에 가서 볶음밥을 한 그릇씩 사주셨다.
동생과 나는 장구경도 재미있었지만 볶음밥을 먹는 장날을 늘 손꼽아 기다리곤 했었다.
우리는 달력에다 양평 장날은 크게 동그라미를 쳐 놓았었다.
그런데 8얼 중순쯤 어머니와 동생은 서울에 가시고, 나와 아버지 둘만 양평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분명히 그날이 장날인데도 아버진 장에 가실 생각도 안 하시고 하루 종일 일만 하셨다.
점심을 먹고도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자, 나는 눈치만 보며 마당에서 애꿎은
나뭇잎만 마당에 한가득 뿌려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 늦게 아버지는 옷을 입으라고 하시고 자전거를 꺼내셨다.
양평읍에 장 구경을 가자는 것이다.
내 평생에 그렇게 신나는 일이 또 있었을까?
아버지 자전거는 미루나무 숲길을 지나 강 옆을 '쌩쌩' 소리를 내며 달렸다.
나는 그 뒤에 매달려 혹시 장이 끝나지나 않았을까, 중국 음식점 문이 닫혔을까 걱정스러웠다.
양평읍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음식점으로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위해 볶음밥 한 그릇만 시키시고, 당신은 계속 신문을 보고 계셨다.
나는 볶음밥과 반찬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주인에게 계산을 하실 깨 돈이 한 그릇 값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루 종일 내 눈치를 살피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나를 장터로 데려오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버지의 등을 꽉 붙잡고 머리를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묵상 기도 내내 아버지 등에 업혀 있던 모습,
또 아버지 자전거 뒤에 매달려 달리던 모습을 생각했다.
그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묵상 중에,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예수님께서 날 업고,
예수님이 모는 자전거 뒤에 내가 그분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꼈다.
아버지의 사랑 속에, 아버지의 체온 속에, 예수님은 거기에 살아계신 것이다.
철이 들면서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모든 자식들의 공통된 마음이리라.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세월고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슴속에 새록새록 피어난다.
그것은 아마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그분들의 크신 사랑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의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무조건의 사랑,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인생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면 그분들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바람과 같은 인생, 그분들을 만날 그날을 그려본다.
◆ 허영엽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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