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좀 꺼주세요 

하느님! 감히 일러바치자면요, 
요즘 하느님하고 맞짱 뜨자고 덤비는 오만불손한 것들이 많지만, 
그중의 첫째는 아마 텔레비전이 아닐까 해요.

예전의 텔레비전 위세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산층 가정의 거실엔 보통 1인용  소파 두 개와 
3인용 소파 한 개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었지요. 
1인용 소파 두 개 사이엔 보통 유선 전화가 놓였고요.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거나 과일을 깎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네요. 
마주 보고 놓인 소파들은 소통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하느님, 요즘 아파트나 개인주택,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한번 굽어보세요. 
모든 소파가 마주 보고  있는 집은 거의 없답니다. 마주 보고 의자가 놓여 있는 건 
직장 회의실이나 중역실 정도뿐이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소파들은 어느새 나란히 놓이는 세상이 됐답니다. 
나란히 놓인 소파들의 전면으로는 거실 넓이에 비해 터무니없이 큰 텔레비전이 
일반적으로 놓여 있어요. 
틈만 나면 가족들은 텔레비전에 경배드리는 자세로 일렬종대를 이루어 앉습니다.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무슨 말이라도 꺼내면 '조용히 좀 못하나?' 하고 
어른조차 핀잔을 주기 일쑤예요. 

좋아하는 드라마라도 방영될 때, 텔레비전 앞에서 잡담을 늘어놓으면 
미사 중 잡담을 늘어놓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의 현상이 일어나지요.

손님이 와도 텔레비전을 켜놓는 집이 많습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조차 밥그릇·국그릇을 들고 텔레비전 앞으로

가는 풍경을 보는 것도 흔한일이 되었지요. 
버스를 타도 텔레비전을 피할 수 없고, 피로를 풀기 위해 동네 목욕탕에 가도 그렇습니다.

공공장소에서 텔레비전 볼륨은 일반적으로 귀가 울릴 만큼 높습니다. 
기차나 버스 정거장·사무실·마을회관· 목욕탕·식당·술집 어느 곳을 가든 '텔레비전님'을 피할 수 없어요. 
제가 보고 안 보고, 선택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텔레비전님'은 차별 없이 공평하게, 폭력적으로 우리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귓구멍을 넓혀주십니다.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건 자본입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고 모두 나쁜 건 아니지만요, 
그러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우리의 영혼 속에 무방비적으로 박혀드는 건 
소비 욕망의 자극입니다. 
끝없이 이윤을 더 창출해야 할 '자본 원리'가 텔레비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본 원리는 소비를 부추겨 이윤을 만들어 내야 하고, 그러려면 소비 경쟁심을 유발해야 하니까 
우리를 끝없이 이간질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을 위한 경쟁심이 
극대치로 유발되고 나면 대화·소통·사랑은 불가능해져요. 
가족끼리도 마찬가지가 됩니다. 

하느님, 오늘 우연히 어떤 중학교 1학년 영어 교과서에서 재미있는 걸 봤습니다. 
갖가지 의학 정보를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자신의 수명을 측정해 보는 내용이었어요.
예를 들어 '당신의 조부모 중 한 분이라도 85세 이상 생존했느냐?'고 묻고 
'그렇다,'고 한다면 평균 수명에 '2'를 더한 것이 자신의 예상 수명이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여러 문항 중에 이런 문항이 있더라고요. 

'Do you watch TV much every day?' 대답이 '그렇다,'이면 '2'를 빼도록 설정된 문항이었어요. 
요컨대 텔레비전을 날마다 많이 보면 2년쯤 더 빨리 죽는다, 뭐 그런 결론이지요.
폐일언하고, 텔레비전을 오래 보는 건 건강에도 결정적으로 안 좋다는 것인데요,
화가 나는 건 건강에도 안 좋은 텔레비전을 강제로 봐야 하는 이 몰상식하고 폭력적인 사회 환경이에요.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휴게소를 가거나 식당을 가거나 목욕탕에 가도 
텔레비전을 볼 수밖에 없는 이것, 이 모든 게 매우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는 이것, 
심지어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는 걸 서비스로 알고 있는 이런 환경 때문에 미치겠어요.

하느님, 제가 보고 싶지 않은 곳에서 제 의사와 아무 상관 없이 켜져 있는 무지몽매한 텔레비전 좀 다 꺼주세요.
텔레비전에 더 이상 경배드리고 싶지 않아요. 
하느님 빼놓고 제가 경배드려야 할 것은 사람을 비롯한 살아 있는 생명들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 좀 만들어 주세요.
제 역량으로 안 되는 일이어서 그래요, 하느님.

- 박범신 < 아름다운 향기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