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소중함  

결혼함과 동시에 세상이 일변한다. 
이미 거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서성거릴 수 있는 길가의 뜰은 없다. 
길은 다만 길고 곧게, 그리고 먼지가 뽀얗고, 
묘지로 통할 따름이다. 

-로버트 스티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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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 대한 명상

우리에 눈은
어떤 카메라의
렌즈보다도 훌륭하다.

어떤 악기보다도
뛰어난 악기는
우리들의 성대이다.

어떤 아름다음에 못지않은
젊은이의 몸매를 보라.

컴퓨터가
아무리 영명하다 해도
우리들 두뇌의
생각 기능에까지 미치려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그리고 렌즈는, 악기는, 컴퓨터는
생명이 다하면 썩을 길이 없으나
우리는 다행이 흙으로 돌아간다.

다만 흙으로 빚은 우리 몸의 지체를
더러는 흙보다도
낫게 쓰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흙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낸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진실을 보고
거짓 증언을 하기도 하고
두뇌 또한 남을 음해할 궁리에
쓰이기도 한다.

흙은 차라리 침묵하나
우리에 목은 가래 섞인 험담을 하며
흙은 독이 되지 못하나
독이 되기도 하는 저 육체를 보라.

혹시,
흙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정  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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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껍질 


                  파블로 네루다 


자작나무 껍질처럼
그대는 은빛 향기:
나는 그대의 눈을 빌어
봄을 그려야 하네. 

내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나
여인 없이는 책이 처음에 생길 수 없었을 것:
책들은 키스로 쓰여지는 것이니
(그러나 지금은 조용해 주었으면 하네
빗소리를 듣고자 하니). 

두 바다 사이에 모든 내가
낙심한 깃발처럼
걸려 있음을 말하고자 하네.
그리고 내 눈먼 연인을 위해
나는 죽을 수 있네 
비록 내 죽음이
부족한 기관이나 
옷장 안에 쌓인
불필요한 슬픔 때문이라 할지라도.
사실은, 시간은 멀어져가며
미망인의 목소리로 부르네
잊혀진 숲 속에서. 


내가 세상을 보기 전, 그 때
아직 눈뜨지 않았을 때,
나는 이미 네 개의 눈을 가졌네:
내 것과 애인의 눈을:
내가 변했는지 묻지 말아다오:
(시간만이 늙어가는 것):
(그는 언제나 셔츠를 갈아입네
내가 산책 나간 사이에) 


모든 사랑의 입술이
옷을 만들었네
내가 발가벗은 듯했을 때: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아니면 테레사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열정에 빠져 자주 
산책하게 되었네 


그대는 나중에
내 사랑 속에 태어날 여인,
진흙으로 빚어진 
혹은, 날개를 달고 날아갈
혹은, 대지에 붙박혀
머리칼을 나뭇잎에 묻을
또는 토파즈 빛 속에 떨어지는 
벌거벗은 동전과 같이
동그란 여인
내 뻔뻔한 게으름을 보살피는 대리인
아니,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내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여인. 

자작나무의 빛은
봄의 껍질이니.


-출처:  (Copper Canyon Press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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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네루다는 놀라운 시인입니다. 아마도 <시를 쓰는 것은 호흡하는 것과 같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 아닌가 합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에 완성한 이 시에서 네루다는 세상과 인생과 여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의 초기 시집 <20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서 보여 주었던, 여인에 대한 농염한 사랑이 아닌, 70 살이 넘은 노시인의 여인에 대한 사랑,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여인에 대한 사랑은 경이롭기만 합니다. 

 네루다의 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스스로 anti-intellectual이라고 했고, 시론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위대한 시인의 이러한 고백은 뜻밖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네루다의 시가 그 자신의 어떤 인생의 절실한 체험들에 의하여 쓰여졌음을 생각하면 그의 이러한 태도가 이해됩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어떤 절실한 동기에 의하여 쓰여진 시는 시론의 구애를 받을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시는 저절로 자신의 시적 형식을 찾아간다는 것이 네루다의 생각인 듯 싶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발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은 <절실함> 없이 시인임을 내보이기 위하여, 시인임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인임에 의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자주 가집니다. 그런 시인들에 의하여 <생산되는> 시들이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네루다는 아마도 가장 널리 읽히는 시인일 것이지만, 평론가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는 좋은 음악과 같이, 현학적인 해설이나 이론의 도움을 빌지 않고도 직접 가슴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시가 평범하거나 깊이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네루다는 난해한 시론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천재성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표현으로 시를 썼고, 펜 끝으로 <깔짝거리며>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용해 주었으면 하네/ 빗소리를 듣고자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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